절판의, 잊혀진 계절

술 마시고
당구 치고
노래방 갔다
그집에 갔다
왔다

주인은
대학로에게
저 아끼던, 아끼는, 두고두고 아까울
사진집을 덜컥 주었다

주인은
나에게
그러니까 남주어도 아깝지 않을 무슨 책 한 권과
몽골제 보드카 한 병을 주었다

나는 답례로
신던 양말을 벗어 놓고
왔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러니까 연애와 자우림과 한성별곡과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와
그밖에 오디오와
그밖에 연애와
그밖에 연애 얘기를 하다가

대학로는 먼저 가고
주인은 잠들고
나는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 소리를
홀로 듣는 객 모양
모든 소리를 30년 전 소리로 돌려 놓는
영묘한 재주가 있는
오디오 소리를 푸지게 듣다가
왔다

책은 두고
술병만 챙겨
왔다

다 좋은데
양말을 벗어 놓고
왔다

다음 날
죽었다
살아
났다

날림 모스 전신기

못에다 에나멜 선을 칭칭(친친인가?) 감아서 전자석을 만들고
굴러다니는, 멀쩡한 랜턴에서 꼬마전구를 적출해서 재활용하고
로트링 아트펜 케이스를 전지 가위로 잘라서 스위치를 만들고
굴러다니는 집성목 판자떼기(때기인가?) 위에 대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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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실험왕 5: 전기의 대결>> 50페이지 셋째줄을참조하시압.

절판의 계절

실신할 것 같은 마음으로
따위의 숲에 나앉았는데
뭔가
머리를

친다

기분 나빠 쳐다보니 낙엽이다

그만 하면 됐다고
그만하라고
그만 하고 정신 차리라고

그만 정신 차리고 다시
쓰라고 그리고
살아가라고
삐뚤빼뚤 가더라도 (      )의 길을 가라고, 가을이
정보과 형사를 보내

한 대

쳐준 것일까

낙엽에 한 대 맞았을 뿐인데
그게 꼭 둔기로 맞은 것처럼
아프다

왜 내 이별은 비데로 뒷마무리한 것처럼 개운하지 않은가
왜 내 문장에는 채워넣어야 할 괄호가 남아 있나

절판의 계절

유명하다는 카페 골목에서
진짜 오리지날 순 숫 노총각과 차를 마신다
그는 베트남 가서 색시감을 데려오면 어떻겠냐는 이웃의 조심스런 권유를 받은 적도 있다
아내는 내가 이 골목에 오는 걸 극구 반대했다
아마도 물가에 어린아이를 내놓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유명하다는 카페 골목에 앉았는데도
낭만은 어디 망명갔는지 콧배기도 안 보이고
7천원이면 라면이 몇 갠데…
나는 얼그레이 한 잔 값이 아까운 것이다
자고 갈 거죠?
생긴 거는 안 그런데 무지하게 예민한 이 총각
오늘은 웬일로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인다
밤길은 멀고 들어 자나 한데 자나 뒤척이기는 마찬가지일테니까
비문이라도 쓰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니까
총각의 늙은 개는 저 혼자 밤을 짖어야 할 것이다
나는 본연의 싸가지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아무도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기로 한다
그나저나 아들친구들에게 잘 해 줘야 겠다
나 죽으면 운구해 줄지도 모르는 놈들이니까

로스트 겁 헤드*

주)*로스트 겁 헤드는 겁이 없다는 뜻을 가진, 저 한 시대를 풍미 했던 비속어를 완곡하게 표현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