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행사는 2시에 시작인데 2시까지 가질 못했다. 그나마도 아예 참석을 안 할까 하다가 마지못해 간 것이다. 이제 태권도장서 하는 발표회는 심드렁하다. 내 자식이나 남의 자식이나 다 수준이 거기서 거기라 볼 것도 없고 시끄럽기만 하고 좁아터진 곳에서 옴닥옴닥 앉아 있으려면 답답하고 그렇다. 아무튼 늘 그렇듯 본격적으로 쇼를 하기 전에 부모님 은혜에 감사하는 카드 전달식을 한 모양인데 늦게 가는 바람에 그걸 직접 받지 못했다. 다른 애들은 부모님께 직접 주는데 우리집 애들은 카드를 받아줄 부모가 없어서 서운했을까 모르겠다. 카드 내용도 맨날 거기서 거기라 집에 와서도 거들떠 보지도 않았는데 본격적으로 좋은 주말 ‘되야 할’ 일요일 아침, 아이 책상에 카드가 놓여 있길래 무심코 집어 들어 읽었다.

부모님께
부모님, 저를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는 2010년에는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셨으면 좋겠어요^^. 2010년에는 여름 방학 때 놀이 동산에 갔으면 좋겠어요.(제주도도 가지만……)

2010년에 부모님과의 약속
1). 엄마가 깨우지 않아도 일찍 일어나기.
2). 말썽 피지 않기.(가끔은 피겠지만 -.-)
3). 동생과 싸우지 않기(맨날 그 녀석이 시비를 걸어서…)

아들아, 괄호치기를 참 잘 하는구나. 글을 쓰면서 괄호를 쳐서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을 보니 네게도 슬슬 자의식이 생기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자의식 그거 때로는 사람 미치게 하는 건데. 너도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있으니 네 내면에도 들어설 건 하나둘 씩 들어서야겠지, 암. 그리고 맨날 시비를 거는 그 망할 녀석 때문에 너도 인생이 영 괴로운 모양이구나. 아빠도 그렇단다. 어쩌겠니. 갖다 버릴 수도 없고. 그런 게 가족의 굴레라는 거다. 끝으로 놀이 동산에는 나중에 니 여자친구하고 가길 바란다. 아빠 돈 없다. 그나저나 니 엄마는 언제나 일어나 이 불쌍한 아빠 아침을 차려준다는 것이냐. 이상.

오늘의 문장

“적어도 집권자가 그들을 기만하려고 애쓰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다수 대중은 정치생활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 자, 그럼, 대중 여러분! 오늘도 좋은 정치생활 되세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4, p287

MB 치하의 국민 여러분! ‘되다’ 많이 사용하시는 한 해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삼성전자 서비스 텔레마케터가 나중에 피드백 전화가 걸려올 거라며 하는 말: 잠시 후 좋은 상담 되십시오. 얼마 전에는 운전하는 사람에게 그럼 좋은 이동 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는 말도 들었다. 지금도 인천공항 출국장 전광판에는 좋은 여행되시기 바랍니다, 라고 반짝거리고 있을 것이다. 나도 할 수 있다 뭐. 그럼 좋은 눈싸움 되세요, 따위 주니어님들.

모임은 즐거워

어제 낮에 광교산 자락 어느 식당에서 열린 모종의 모임에 참석을 했는데 좌장격인 사람이 시종일관 남의 말은 듣지도 않고 자기 얘기만 장황하게 떠들어 대는 바람에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이건 뭐 유치원생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들어 있는 단어에만─그 사람이 말하는 내용이 아니라─반응하면서 상대방 말을 자르고 제 입만 놀려대니 대화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금쪽 같은 시간을 쪼개 비싼 기름 써 가며 천리길을 운전하고 왔는데 연장자에 대한 예우상 묵묵히 듣고만 있자니 속에서는 열불이 났다.

내 경멸을 눈치 챈 것일까? 모임을 파하느라 주차장에서 서성거리는 자리에서 그는 새삼스럽게 악수를 청하며 자기가 말이 너무 많았다고 말했다. 이크, 끝까지 거리를 두었어야 했는데 방심하다가 당했다. 아닙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나는 의례적인 멘트를 쳤다. 우웩, 내 멘트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면전에서 표나지 않게 사람을 경멸하려면 잠자코 앉아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즐겁다는 표정을 지으며 상대방의 말에 간간히 추임새도 넣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다들 그렇게 만난다. 겉과 속이 다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