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1.
다음은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구절이다. <앨리스는 나이 든 유모의 귀에 대고 갑자기 "유모! 내가 배고픈 하이에나이고, 유모가 뼈다귀라고 상상해 봐요."라고 소리를 질러서 유모를 기겁하게 만든 적도 있었다.> 내가 이 구절을 읽어주자 우리집 애들이 다양한 패러디를 제시했다. 이런 식이다. “기언아, 내가 배고픈 두더지이고, 네가 지렁이라고 상상해 보자.” “형아, 내가 사자고 형아가 얼룩말이라고 상상해 보자.”

2.
더러 영혼이라는 말을 쓰기는 하지만 나는 영혼의 존재를 믿지는 않는다. 귀신이라는 말을 쓰기는 하지만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으니 내 안에 몇 개나 되는 영혼이 짱박혀 있는지 헤아려 본 적도 없다. 어떤 책을 보니 “우리 내부에 여러 개의 영혼이 있다”고 주장한 “학파”도 있었단다. 영혼이 여러 개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해 봐야겠다. 일단 하나는 팔아 먹고.

3.
영혼 사세요. 영혼 사세요. 카인의 몸에서 방금 적출한, 따끈따끈한 영혼 사세요. 영혼 사세요. 영혼 사세요. 피가 줄줄 흐르는, 아무 짝에도 쓸 데 없는, 고독한 영혼 사세요. 이슬 같은 영혼도 있구요, 쓰레기 같은 영혼도 있구요, 오염된 영혼도 있구요, 실연당한 영혼도 있구요,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영혼도 있습니다요. 아, 물론 ‘듣보잡’ 영혼도 구비되어 있습죠.

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씀, <<삼성을 생각한다>>, 사회평론, 2010

1.
지난 주 수요일 저녁, 노모를 모시고 어디를 좀 다녀 오는 길에 핸드폰이 울리는데 받을 수가 없었다. 통화 버튼을 눌러야 통화가 되게끔 설정을 해 놓았는데 통화 버튼을 눌러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눈 뜨고 부재중 전화 1통이 단말기에 찍히는 걸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었다. 핸드폰을 껐다 켜서 상대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요일, 아무 일도 없었다. 금요일 아침, 일어나 습관처럼 핸드폰 슬라이드를 밀어올리니 핸드폰 액정이 나갔다. 대란이다. 껐다 켜니 다시 들어 온다. 별일 아니군. 그런데 결국 별일 아닌 게 아니었다. 액정은 저 스스로 보였다 안 보였다를 반복했고, 전화를 오면 받을 수 없었으며, 문자를 받으면 무슨 내용인지 알 길이 없었다. 금요일 밤, 누군가가 새로 장만한 자신의 아이폰 구경도 시켜주고, 술도 사주고 그랬다. 그는 내 핸드폰이 때 맞춰 식물 핸드폰이 된 건 다 아이폰을 마련하라라는 메피스토펠레스의 계시라고도 했다. 토요일, 일요일, 월요일, 식물 핸드폰의 전원을 인가했다 해제했다 해가며 버텼다. 아이폰이 눈에 아른 거렸다. 화요일, 결국 서비스센터를 찾았다. AS기사는 핸드폰의 위쪽 판과 아래쪽 판을 연결해 주는 케이블이 상했다고, 교환해야 한다고 15분 정도 걸린다고, 언제 구입한 거냐고, 그러면 무상수리는 어렵고 비용이 좀 발생할 거라고 했다. 나는 그 비용이 거액이기를 속으로 빌었다. 홧김에 서방질 할 작정이었다. 불행중 다행인지 다행중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비용이 얼마 안 됐다. 아이폰은 내 것이 아니었다. 수리를 마친 AS기사가 조그만 쪽지를 내밀었다. 자신이 얼마나 친절했었는지 표시해 달라는 거였다. 매우 친절!
그런데 아니었다. 집에 왔는데 버튼을 조작할 때 켜지는 백라이트가 들어오질 않았다. 여러 가지 하는군! 다시 버스 타고 가서 번호표 뽑아서 기다렸다가 차례가 왔길래 접수대 직원한테 여차저차 하다 말했더니 오전에 서비스 받았던 거면 직접 기사한테 가라고 했다. 끙. 갔다. 가서 살짝 불평했다. 이거 안 된다. 오고 가고 시간도 많이 걸리고 교통비도 썼다. 이게 뭐냐? AS기사는 자신이 교체한 부품과 이 증세와는 무관한 거라고 살짝 변명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뜯어봐야 알겠으며 추가비용발생 여부도 마찬가지란다. 기다리란다. 이거 메피스토펠레스가 곱게 안 지나가는군! 천장에 매달린 텔레비전에서 철지난 ‘1박2일’ 을 멍청히 보며 시간을 죽이는데 AS기사가 나를 불렀다. 그는 내 핸드폰의 윗부분 케이스를 통째로 거저로 교환해주었다고 생색을 냈다. 중고차 도장을 새로 해준 것도 아니고 아예 차 껍데기를 새걸로 바꿔준 셈이었다. 핸드폰에서는 광이 번쩍번쩍 났다. 아이폰은 물 건너 갔다. 수요일 밤, 전화가 오는데 낯선 전화번호가 찍힌다. 받으니 그 AS기사다. 수리 받은 핸드폰 이상없이 잘 쓰고 계시냐는 거였다. 시계를 보니 7시 반이었다. 나는 그렇다고 고맙다고 어서 퇴근하시라고 말해주었다. 이게 우리가 아는 삼성이다. 이 책에는 또 하나의 삼성이 있다.

2.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비자금의 세계이다. 비자금은 “회계에 제대로 반영돼 있지 않은 자금”을 말한다. 이 책은 비자금의 세계를 살아가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이다.

이러고들 있다


놀이터에 나가 비비탄을 잔뜩 주워다 목욕시켜 물기 닦는 중.
500ml 페트병 반을 거뜬히 채우는 양. 부모가 안 사주니 자급자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