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끔한 것들을 용서하자

머리 감을 때가 되면 몸이 알려준다. 가렵다. 머리 안 감고 사는 사람들은 이 불편한 것을 어떻게 참고 지내는지 모르겠다. 여기서 더 참으면 가렵지 않은 상태가 찾아오는가.

일요일 아침, 늦잠 자고 일어난 딸아이, 식탁에서 김치국물 한 방울 옷에 튀었다고 쪼르르 달려가 옷을 갈아 입는다.

오, 이 분, 며칠 전에는 모처에 나들이 가서, 떡볶이 드실 적에, 떡볶이 한 입 드시고 냅킨 톡, 뽑아 옷 한번 딱으시고, 오뎅 사리 한 입 드시고 냅킨 톡, 뽑아 옷 한번 딱으시고 하시는데, 떡볶이 국물을 그냥, 국자로 퍼서 확, 뿌려주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유전자고 뭐고 다 사기다. 내게서 어떻게 저런 깔끔한 개체가 태어났는지 모르겠다. 나는 깔끔한 것들이 싫다. 깔끔한 것들을 용서하자.

오늘 파일 정리하다가 발견한 것

중세풍 성당이 그려져 있는 상자의 뚜껑을 열면 갖가지 모양의 퍼즐 조각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퍼즐 조각들이 어두컴컴한 상자 속에서 이 세계로 나오는 문이 열리기를, 무슨 개벽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학교도들 모양 기다려 왔을 리는 없지만 나는 인사 치레로 그동안 오래 기다렸다는 둥, 늦게 와서 구하러 와서 미안하다는 둥, 괜스레 이말 저말 둘러대는 것이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퍼즐만 보면 굽신거려야 하나.

퍼즐을 쏟을 때는 잠시 망설여야 한다. 거실에 평상을 떡하니 펼쳐 놓고 그 위에 쏟자니 며칠 동안 걸리적거릴 게 뻔하고, 그렇다고 비좁은 책상 위에서 맞추자니 능률이 제대로 오르지 않을 뿐더러 그 동안에는 책상에서 다른 일은 전혀 볼 수 없는 까닭이다. 제일 좋은 것은 퍼즐 조립 전용 작업실을 갖추는 것이다. 여보, 우리 넓은 집으로 이사갑시다. 퍼즐 맞추게.

우리 어머니가 날더러 제 털 빼 제 구녘에 박을 놈이라 하신 적이 있다. 오죽 했으면 당신 배 아파 낳은 자식에게 그런 모진 소리를 하셨을까 싶다만 아무튼 퍼즐이란 게 바로 제 털을 제 구녘에 넣는 것인데 그 털이 다 그 털 같고 그 구멍이 다 그 구멍인지라 퍼즐을 맞추면서 나는 내가 천재가 아님을 절감하게 된다. 퍼즐을 뒤집어 놓고 맞추는 자폐증에 걸린 천재는 그야말로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레어 아이템인 것이다.

물질 세계는 퍼즐을 맞추지 않는다. 물질 세계는 퍼즐을 흐트러뜨리는 방향으로만 움직인다. 어려운 말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것이다. 그까짓 퍼즐 하나 맞추는데 거 참 말 많다. 국가백년지대계를 운운하는 자리에 갔으면 말로써 세상을 아주 말아 드실 뻔했다. 이 사람아 퍼즐을 입으로 맞추나, 그만 닥치고 퍼즐이나 맞추세 그려. 그럼 그렇게 하세 그려. 드디어 나는 퍼즐 조각이라는 물질 세계에 내 정신 세계를 조금씩 주입하면서 하나하나 그림을 완성해 나가기 시작한다.

당신 같은 위버멘쉬적 존재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나는 대개 와꾸부터 맞추는 방법을 택한다. 그게 나 같은 범인이 퍼즐을 맞추는 방법이다. 천재는 중심에서부터 맞춰나간다. 테두리부터 퍼즐을 맞추려면 생김새에 직선이 들어 있는 조각을 먼저 추려내 그림을 보면서 상하좌우에 배치하면 된다.

퍼즐을 맞추는 동안 나는 머리카락을 쥐어 뜯기도 하고, 깍지를 껴서 팔을 머리 위로 쭈욱 뻗어 몸의 기럭지를 최대한 늘여보기도 하고, 화장실에 다녀오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퍼즐을 다 맞추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내가 퍼즐이고 퍼즐이 나인 무념무상의 상태에 이른다. 마침내 런너스 하이에 비견할 만한 퍼즐러스 하이에 도달하는 것이다.

다 맞춘 퍼즐은 미련없이 부수어 원래 상자에 담아 어디 깊숙한 곳에 쳐박아 둘 일이다.

날씨

날씨란 인간이 도무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이다.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그저 속수무책으로 그날 그날의 날씨를, 어쩌면 순간 순간의 날씨를 견디고 또 견뎌야 할 뿐이다.

언어의 용법 가운데 친교적phatic 용법이라는 게 있다. 더러운 세상, 대화나 하면서 친하게 지내보자는 것인데, 다만 정치나 종교, 섹스 이런 얘기는 피차 골치 아프니 그런 얘기는 정 하고 싶으면 니네 집에 가서 니네 집 금붕어 하고나 하던지 말던지 하시고 지금은 이를테면 만인의 공통 화제인 날씨 얘기나 하자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의 자세는 이렇다.

“당신에게 날씨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때에 나는 또한 내가 당신과의 대화를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당신을 이야기를 나눌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나 자신은 反사교적이지 않다는 것을, 또는 당신의 개인적 외모에 대하여 조목조목 비판을 시작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테리 이글턴, <<문학이론입문>> 중에서)

그러니까 우리가, 넌 어째 고쳐도 그 모양이니, 이런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니 날씨야 아무려면 어떤가.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다 얘기 거리가 된다. 맑은 날 애인과 헤어진 사람은 맑은 날 헤어지는 게 비오는 날 헤어지는 것보다 다섯 배는 슬프다고 하고, 비오는 날 하관하는 유족은 비가 와서 고인을 떠나 보내는 것이 더욱 애닯다 하는 것이다.

유세차 모년삼월모일, 창밖에 때 아닌 눈이 내리니 그나마 붙잡고 날씨 얘기라도 할 사람 하나 곁에 없는 우리네 신세가 급 처량해진다. 외로워라,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날씨 얘기 할꼬. 그러나 언어의 친교적 용법이고 뭐고 다 부질 없으니 어버이 살아 계실 때 전화라도 한 번 더 드리는 게 낫다.

황사

토요일 오후, 자제분들을 모시고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 송구스럽게도 아내마마께서 운전을 하옵신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생애와’ 트와잇라잇의 벨라를 생각한다. 오, 벨라 피 한 방울만 마셔봤으면. 그때다. 버스전용차로 단속 카메라에 속도감시기능이 있는가? 운전에 몰입하신 아내마마께서 하문을 하신다. 모른다. 그런 세속잡사를 내가 어찌 아나. 잘 모르겠사옵니다. 무성의한 내 대답에 아내마마께서 질주본능을 억제하시는 게 느껴진다. 세상의 모든 길 아우토반이 되거라. 문 열어라 피야. 문 열어라 피야. 마늘과 십자가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피야. 문 열어라 피야. 아니, 이 마당에 미당은 또 왜 떠오르나. 나는 다시 오, 벨라, 나의 이사벨라만 생각하기로 한다. 뉴문은 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그때다. 뭐야? 여기 과속단속 카메라가 있는데 이 네비게이션은 왜 안내를 안 하지? 아내마마께서 혼자 말씀을 하옵신다. 하마터면 큰 일 날뻔했다. 그러고보니 네비게이션 업데이트 해드린 지가 꽤 지났구나. 이런 불충한 남편을 봤나. 집에 가면 당장 해드려야겠다. 런던의 노란 안개와 가스등 불빛이 창밖을 휙휙 지나간다. 어, 취한다.

21세기의 중세적 상상력

정신 나간 소리지만, 지구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돈다. 비행기 한 마리가 인천공항을 이륙해 동쪽으로 날아간다. 목적지는 하와이다. 비행기가 목적지를 향해서 힘들게, 힘들게 동쪽으로 날아가는 동안, 하와이도 가만히 앉아 있지는 않는다. 하와이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움직이는 지구를 얻어 타고, 어딜 오냐고, 오지 말라고 멀리, 멀리 도망간다. 그러나 지까짓게 가봐야 어딜 가겠는가. 뛰어봐야 하와이지. 마침내 도망가던 하와이를 따라잡은 비행기 한 마리는 호놀룰루 공항에 가볍게 착륙한다.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때린다, 부순다. 말로만 듣던 와이키키 해변의 파도가, 해에게서 소년에게, 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지구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돈다. 아쉽지만 하와이 공항을 마지못해 이륙한 비행기는 이제 서쪽으로 날아간다. 목적지는 한국이다. 비행기가 느릿느릿 서쪽으로 날아가는 동안, 한국도 가만히 앉아서 손 놓고 기다리지는 않는다. 한국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도는 지구를 얻어 타고, 어서 오라고, 날 두고 어디 갔다 왔냐고, 버선발로 비행기를 마중, 나온다. 드디어 비행기와 한국은 중간에서 만난다. 감격에 겨운 한국은 비행기를 와락, 껴안으려고 달겨들지만, 어딜, 비행기는 살짝 피한다. 어딘가 ‘회피 연아’적이다. 그러나 좁아터진 이 땅에서 가면 어딜 가겠는가. 피해봤자 한국상공이지. 비행기는 체념하고 인천공항에 착륙한다. 이로써 중세인을 위한 ‘니가 가라, 하와이’ 패키지 여행은 끝나고, 사람들 일상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