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드름

저녁 식탁에서 아내가 묻는다.
“당신은 어려서 여드름 많이 안 났어?”
사춘기에 접어든 딸아이 얼굴에 여드름이 돋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을 보니 영 심란했던 모양이다.
“안났지 그럼. 내 피부는 말야, 여드름 하나 없이 백옥 같았다구.”
그러자 가족들이 일제히 설마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한 녀석 쯤은 속으로, 또 뻥 치시고 계시네, 라고 추임새를 넣었을 지도 모르겠다.
“피부가 저렇게 인텔렉츄얼 한데… 여드름이 안 났을 리가 없는데…”
아내가 불신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피부가 인텔렉츄얼 하다는 건 내 피부가 지성이라는 뜻이다. 이런 걸 ‘이루족족’ 말로 다 설명해야 한다. 인간은 인간대로 피곤하고, 언어는 언어대로 참 피곤하시겠다.
“사춘기 때 내 피부가 얼마나 고왔냐 하면 말이야. 지나가는 여학생이 한번 만져보자고 덤벼들 정도…”
이런 식으로 ‘야부리’가 파도가 되고, 파도가 해일이 되고, 해일이 썬더스톰이 되고, 썬더스톰이 빅뱅이 되려고 하는데 어디서 블랙홀 같은 막내 녀석이 튀어 나와 초를 친다.
“근데 지금은 왜 그래?”
이런 걸 보고 전문용어로 다 된 밥에 재뿌린다고 하는 거다. 키드득. 가족들, 속이 다 후련하다는 표정이다.
아내가 촌철살인이네, 한다.
“엄마, 촌철살인이 뭐야?”
“니들은 좋겠다. 아빠 닮았으면 여드름 안 나겠다.”
“엄마, 촌철살인이 뭐냐니까?”
이하 중구난방이다.
“살인이 그 살인인가?”
“아니 작은 쇳조각으로 사람을 왜 죽여?”
그러게나 말이다.

소주당하다

어제 또 소주 당했다. 제법 많이 당했다. 도보로, 택시로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소주 당했다. 더불어 글 안 쓴다고 구박 당하고, 깊이도 없이 이것저것 집적댄다고 면박 당했다. 어제는 소주당했는데…(일단 여기까지만)

등산당하다

며칠 전에 등산당했다. 나를 등산한 건 사람이 아니라 산이었다. 용문산이 나를 정상까지 질질 끌고갔다가 만신창이로 만들어 등산로 입구에 패대기쳐 버렸다. 산이 뱉어버린 토사물이라도 된 듯,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나는 조금 비참했다.

http://bit.ly/eciIAL

“우리 아빠 바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내님이 새옷을 사주신다. 입어 보니 바지가 조금 길다. 정말이다. 조금, 조금, 아주 조금 길다. 바지 길이를 줄여서 갖다 주시면서 아내님이 중얼거리신다. 그러자 나는 새옷이고 뭐고 다 싫어졌다.

“바지가 갈수록 우리 아빠 바지처럼 되냐. 통은 크고 길이는 짧고. 엄마가 맨날 아빠 바지 다리면서 어쩌면 이렇게 다리가 짧냐고 하셨었는데…”

다운로드 키드의 생애는 무엇으로 구성될 것인가.

“괴물 보고 싶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어제 마트에서 사온 크림빵을 낼름 챙겨먹은 녀석은, 아마도 이 길고 긴 월요일 오후는 또 뭘 하며 보내야 하나, 몸부림치고, 몸서리도 치며,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저 말이 불쑥 튀어 나왔으리라.

좋다. 다운 받아 주겠어. 나는 굿 다운로더니까. 굿 다운로더 몰라? 영화관에 가면 영화 시작하기 전에 유명 영화 배우들이 우르르 몰라 나와 굿 다운로드, 굿 다운로드, 하잖아. 또, 예쁜 여자애가 카메라 광고도 하면서 핸드폰을 진동으로 하라는 둥, 앞자리 발로 차지 말라는 둥, 관람 에티켓 지키라고 훈계도 늘어 놓고.

“아빠가 영화를 다운로드 받는 동안 너는 거실에 늘어놓은 레고를 주어 담도록 하여라.”

“네.”

아, 석봉이 어머니 심정을 또 알겠다. 나는 떡을 다운로드 받으마. 너는 레고를 맞추도록 하여라. 문제는 괴물이 다운로드 목록에 없다는 거였다. 이제 어쩌지? 이제 어쩌지, 이 대사 모르는가? 니모를 찾아서, 마지막 장면에서 치과 의사의 수족관을 집단 탈출한 물고기들이 투명한 비닐 봉지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치던 드립 말이다.

“다운로드가 안 된다.”

녀석 급 실망하더니 대안을 찾는다.

“그러면 몬스터 에얼리언 볼래.”

“그건 뭔데?”

“있어.”

자식놈님께서 있다면 있는 줄 알아야지. 아빠 따위가 별 수 있나? 나는 다시 영화를 검색한다. 행인지 불행인지 이 영화도 다운로드 목록에 없다. 거 굿 다운로더 되기 되게 힘드네.

“그것도 안 된다.”

“그럼 DVD 빌려다가 볼래.”

녀석은 포기하는 법이 없다. 나는 손을 부르르 떨며 고이고이 모셔둔 500원짜리 네 개를 건네며 묻는다.

“레고를 다 담고 나서 빌려올 거냐? 아니면 빌려온 다음에 레고를 담을 거냐?”

“아빠는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

“나는 아무 상관 없다.”

는 말이 시작되기도 전에, 녀석은 인라인스케이트를 신고 다녀 올게요, 하고 나갔다가 차 조심하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돌아와 삑, 삑, 삑, 삑, 현관 문을 연다.

“왔어요.”

“빌려 왔어?”

“엉, 다행히 대여가 안 됐더라구우.”

신이 난 녀석의 말꼬리가 올라간다. 뭐, 대여? 너 방금 대여, 라고 발음했냐? 이 아빠가 대여, 라는 말도 몰라서 너 한테 빌려왔냐, 고 물어 봤겠냐? 대여 자 한자로 쓸 줄도 모르는 무식한 녀석이… 감히 어디서, 어따 대고, 문자야, 문자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녀석은 괴물 삼매경에 빠져든다.

“온다. 온다. 아빠, 재미 있는 장면이야. 아빠도 와서 봐.”

“너나 봐.”

“헐. 흐흐흐. 와우. 특수 효꽈 완전 잘 하는데. 흑. 아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