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새

‘새’ 자 들어가는 건 다 개좋다.
새누리당도 개좋고 새정치민주연합도 개좋다.
고백하거니와 새마을운동도 개좋았다.
더 새마을 무브먼트 비갠 인 나인티세브니원, 이라는 문장을 영어 선생한테 두들겨 맞아가며 배웠다.
이, 나라가 아닌 나라는 곧 새나라가 될 것이고
이, 국민이 아닌 국민은 곧 새국민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새 봄의 새 하늘을 날아다니는 한 마리 새 새

07-060

어쩌다가 “환경정비용마대”가 된 전직 플래카드가 한때 자신이 세상에 대고 발음했던 자모음들을 50리터 들이 내면에 구겨넣은 채 가엾은 짐승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는 07-060 버스 정류장

아빠의 본분

나는 본의 아니게 아빠다. 귀찮지만, 아이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어야 한다.

“아빠는 뭐 좀 먹을 건데 넌 어떻게 할래?”

“난 짜파게티 먹을래.”

“그러자. 그럼 지금 두 개 끓인다.”

“지금?”

“응.”

“난 지금 씻을 건데…”

“그럼 씻고 나서 니가 끓여, 두 개.”

“그래.”

이로써 나는 배고픔도 해결하고, 귀찮음도 면하고, 아빠 노릇도 다 했다.

“저기 바깥에 있는 사태들”과 텍스트

즉 하나의 과학적 텍스트는, 특히 그것이 어떤 “저 바깥에 있는 것” 예를 들면 “원자”를 의미하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바흐의 푸가나 몬드리안의 그림들과 구분되고 있다. 그것은 “진리적”이고자 한다. 즉, 저기 바깥에 있는 사태들과 정합적이고자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어쩌면 어떤 놀라운 미학적.인식론적 문제가 제기 된다 : 도대체 텍스트 속에 있는 그 무엇이 저기 바깥에 놓여 있는 사태와 정합적인가? —p. 54

즉 신문의 내용 중 한 부분은 도서관으로 향하고, 나머지의 대부분들은 쓰레기통으로 던져진다. 따라서 완전히 다른 유형의, 신문에 글쓰는 사람이 존재하게 된다. 신문에 글쓰는 사람들 중 한 부류는 도서관들을 위해 쓰고, 다른 부류는 쓰레기통을 위해 쓰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준에 따라 신문은 두 부류로 나눠질 수 있다. 즉 대체적으로 도서관에 적합한 신문과 그 대부분이 휴지통에 적합한 신문. —p. 207

—빌렘 플루서(지음), 윤종석(옮김),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 :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 문에출판사, 2002(1판 3쇄), p.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