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하나의 과학적 텍스트는, 특히 그것이 어떤 “저 바깥에 있는 것” 예를 들면 “원자”를 의미하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바흐의 푸가나 몬드리안의 그림들과 구분되고 있다. 그것은 “진리적”이고자 한다. 즉, 저기 바깥에 있는 사태들과 정합적이고자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어쩌면 어떤 놀라운 미학적.인식론적 문제가 제기 된다 : 도대체 텍스트 속에 있는 그 무엇이 저기 바깥에 놓여 있는 사태와 정합적인가? —p. 54
즉 신문의 내용 중 한 부분은 도서관으로 향하고, 나머지의 대부분들은 쓰레기통으로 던져진다. 따라서 완전히 다른 유형의, 신문에 글쓰는 사람이 존재하게 된다. 신문에 글쓰는 사람들 중 한 부류는 도서관들을 위해 쓰고, 다른 부류는 쓰레기통을 위해 쓰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준에 따라 신문은 두 부류로 나눠질 수 있다. 즉 대체적으로 도서관에 적합한 신문과 그 대부분이 휴지통에 적합한 신문. —p. 207
—빌렘 플루서(지음), 윤종석(옮김),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 :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 문에출판사, 2002(1판 3쇄), p.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