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정리

책상 위에 잡다한 물건들이 너무 많다. 읽고 쓰는데 필요한 것만 빼고 다 버리자. 개뿔. 꿈같은 얘기다.

앞으로는 책상을 책상이라 부르지 않고 작업대라고 부르겠다. 내 책상 위의 것들은 다 내 작업에 꼭, 반드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이라고 생각히겠다. 아무렴.

책상 정리하지 않을 것이다. 됐다. 이제 됐다.

정신이 산만하고, 영혼이 잡다하며, 마음이 번잡한 인간은, 그에 딱 맞는, 지저분하고, 너저분하고, 잡다하고, 우우, 더러운, 그런 책상을 갖는 거다.

공구 상자

마트에서 공구 상자를 보았다 크고 좋았다 공구 상자에 들어 앉아 망치랑 마냥 놀고 싶었다 공구 상자 손을 잡고 계산대를 무사히 지날 수는 없었다 공구 상자를 두고 오는 발걸음이 오함마처럼 무거웠다 마트 가고 싶다 일산백병원 상가에 다녀온 23시 52분 집에도 공구 상자는 몇 개 있다 친구에게 얻은 프랑스제 메이크업 가방도 나는 공구 상자로 쓴다 책상 위에는 대패가 있다 상가에서 고교 동창에게 포트란이라는 단어를 들었다 포트란이라는 단어가 반가운 사람은 코볼이라는 말도 그리울 것이다 그리운 것은 많다 마트 가고 싶다 마트 가서 공구 상자 구경하고 싶다 넋놓고

멀리

커가는 아이들, 점점 집에서 멀리까지 갔다 온다. 어떤 날은 아침 일찍 나가 밤 늦게 온다. 아직은 내가 가본 곳에만 간다. 인사동, 광장시장, 홍대앞. 더 크면 더 멀리 갈 것이다. 내가 가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곳에 갈 것이다. 토요일에 지 엄마한테 옷 사달래서 새옷 얻어입고, 일요일에 어디를 하루종일 싸돌아 다니다 다저녁에 들어온, 오늘은 친구와 노량진에 간다던 1호는, 작전이 변경되었는지, 아직 잔다. 한 시간 전에 롯데월드 간다고 아침도 아니 먹고 현관문을 나선 녀석은 2호다. 3호는 아직 어디 안 간다. 학교, 집, 학교, 집, 어쩌다가 친구집, 이게 전부다. 토요일에 동창 여남은 명과 초등학교 적 선생님 찾아 뵙고 짜장면 곱배기 얻어 먹고 온 3호는 지금 거실 쇼파에서 스마트폰으로 만화 본다. 늦은 밤에, 그러니까 밤 열두 시도 넘은 시각에 막내 하복 상의 두 벌을 다림질하며 텔레비전을 보던 아내도 잔다. 2호가 현관문 여는 소리에 잠이 깬 나는 ‘파파’ 하며 집으로 돌아온 베로니카를 생각한다. 부처님오신날 아침, 구구꾹쿠 구구꾹쿠, 비둘기 우는 소리 들린다.

오늘의 문장

“철새는 우리나라에 찾아오는 시기와 머무는 시간에 따라 다시 여름철새, 겨울철새, 나그네새(통과철새), 길잃은새(迷鳥, 미조)로 나눈다. 여름철새는 봄에 와서 번식한 후 여름과 가을에 월동지로 이동하며, 겨울철새는 가을에 와서 겨울을 지낸 뒤 이듬해 봄에 번식지로 이동한다. 나그네새는 우리나라 이외의 번식지와 월동지를 오가다가 봄과 가을에 우리나라에 잠시 들르는 새를 말하며, 길잃은새는 이동 경로상 우리나라에 규칙적으로 오지 않지만 길을 잃거나 경로를 이탈해 우연히 찾아든 새를 말한다.”

–박진영(글.사진), <<새의 노래, 새의 눈물>>, 필통 속 자연과 생태, 2010, 27쪽

이태원 낮술

더운데 시원하게 맥주 한 잔 하자며 낮술 얘기가 나왔다. 나는, 낮술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는데 “이러면/안 되는데”가 전문이라고 말했다. 맞은 편 여자는 날더러 글 쓰시는 분이냐고 물었다. 나는 심리적으로 켁켁거렸다. 너나 드시라는 둥,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못 먹는다는 둥, 시원해서 좋다는 둥, 모두들 한두 마디씩 보탰다. 누군가 이태원 얘기를 꺼냈다. 경리단길이 좋다고 거기 한번 가보시라고 내게 권하는 이도 있었다. 나는 경리단 길은 가로수길 보다 좀 나은가 물었다. 가로수길은 연전에 가봤는데 영 번잡스럽기만 하고 정신머리 사나워서 그저 그랬던 기억이 있다. 경리단길은 괜찮다고 그는 말했다. 이태원에서는 낮술을 마셔도 괜찮다고 그는 말했다. 이태원 낮술, 뭔가 낭만적인 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