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인가

언어를 생각하는 대신, 아이폰으로 차창 밖을 찍는다. 저 불빛 속에 무엇이 있는가. 언어가 있는가. 모종의 그리움이, 모종의 안타까움이, 그리하여 결국 모종의 슬픔이 있는가. 저 창밖의 풍경을 잠시, 그러니까 10초, 15초 동영상으로 포박해 두면 나는 나인가. 이 영상을 그것에 이어 붙이면 그림이 되겠다 생각하는 나는, 단어와 문장에 괴로워 하던 나인가.

심부름 가기 싫다

아내가 빵가게 가서 빵 사오라는 걸 싫다고 하였다. 아내는, 싫으면 관둬라, 내 아들 시킬란다, 하였다. 그 아들들 다 디비 주무신다. 아니다. 한 분은 사실 일어나 유튜브 컨텐츠, 웹툰 컨텐츠, 뭐 이딴 거 과소비하고 계시지만 글의 재미를 위해서 그냥 다 잔다고 하는 거다. 지금이 토요일 오전 10시인데 이따 사위가 깜깜해질 때까지 아들들 다 쿨쿨 자면 좋겠다. 그래야 아내가 나라는 존재의 무지 유용함을 깨닳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싫다하면 심부름값을 주겠다든가 봄이고 나들이철이고 하니 포르쉐 한 대 뽑아주겠다든가 하며 딜을 해와야지 저리 순순히 물러설 줄은 몰랐다.

성기고 시끄러운 신호 sparse & noisy signal

사건의 지평선 망원경 Event Horizon Telescope 으로 블랙홀 사진을 찍은/합성한 Katie Bouman이 칼텍 Caltec 에서 강연하는 영상을 유튜브에서 보았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그가 처리해야 했던 신호가 아주 성기고 아주 잡음이 많았다고 말하는 것은 용케도 알아들었고, 그 표현에 뭔가 시적인 데가 있다고 느꼈다. 과학은 시하고 내통하는 것이라고 내 마음대로 아무거나 아무데나 갖다붙이고 싶어졌다. 당신의 신호는 가물가물하고, 게다가 주변은 시끌시끌하다니! 소주 한 병의 안주 단어로는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얘기, 아무한테도 하지 않는다. 이런 얘기, 듣는 귀가 이제는 없다. 당신에게 내 근황을 말해주겠다. 나는 물리학 책 읽고, 수학 책 일고, 철학 책 읽고 그러면서 지내고 있다. 심오한 거 읽는 거 아니다. 정적분이나 상대성이론,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뭐 이런 거 읽는다. 벚꽃 구경도 좀 했다. 시집 같은 거 안 사고, 소설도 읽지 않는다. 아이폰에 메모는 곧잘 하는데 따위넷은 잊었다.

애 셋 가운데 두 분은 대학생이 되셨다. 어엿한 거 같지는 않다. 막내는 엊그제  4.16에 제주도에 있었다.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지음), 김욱(옮김), <<쇼펜하우어 문장론>>, 지훈, 2005.12.26(초판 1쇄), 2008. 2. 29(초판 6쇄).

쇼펜하우어는 헤겔이가 몹시 꼬왔다. 별것도 없는 놈이 잘 나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깠다. 다음의 인용문을 읽어보자.

“이 같은 목적[무의미한 단어를 사상으로 위장한 후 독자의 지갑을 열게 하려는]을 달성하고자 그들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를 둘러대고, 복잡한 부호 등을 활용해 마치 지성인인 것처럼 행세한다. 이것은 그들에게 결코 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 (102쪽)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호주머니 속에 이런 종류의 가면이 수도 없이 저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같은 현상이 독일에서만 통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독일에 이런 가면을 소개한 장본인은 피히테였고, 셀링이 완성했으며, 헤겔을 통해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그 매출은 엄청난 수치를 자랑하고 있다.” (103쪽)

“나[쇼펜하우어]는 칸트에서 중단된 이 궤도를 다시 한번 연장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칸트와 나의 중간에 해당되는 피히테, 셸링, 헤겔 같은 사이비 철학자에 의해 주전원의 원리가 완성되어버렸다. 여기서 그들과 함께 달린 일반 독자들은 이 끝없는 원운동의 출발선상에 자신들이 서 있다는 처참한 사실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213-214쪽)

쇼펜하우어는 시니컬한 사람이다. 내가 받은 인상이 그렇다. 당대의 베스트셀러 따위에 눈돌리지 말고 고전을 읽으라 하고, 사색하라 하고 간결하게 쓰라 하고, 그랬다.

옮긴이는 “이 책은 쇼펜하우어 만년(63세)의 저작인 인생론집 <<여록과 보유 Parerga und Paralipomena>>(1851) 중에서 사색, 독서, 저술과 문체에 관한 부분을 옮기고 제목을 <<쇼펜하우어 문장론>>으로 정했음을 밝혀둔다”라고  밝혀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