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는 절대 항복하지 않는다

우리집 남자 사람들은 주로 셋이 편을 먹고 컴퓨터 두 마리를 무찌른다. ‘다이다이로’ 붙으면 이기기가 힘드니까 좀 치사하지만 그렇게 치수를 조정하는 것이다. 종족은 모두 테란이다.

컴퓨터는 초반에 빠른 속도로 마린과 메딕을 생산해서, 더러는 탱크까지 앞세우고 우리 중 한 명에게 쳐들어온다. 지원병력을 보내든, 쥐새끼 한 마리 드나들지 못하도록 입구를 봉쇄하고 SCV를 다 동원해 벙커를 수리하든, 배럭과 컴맨드센터를 띄워 도망가든, 어떻게든 이 초반 공격만 막아내거나 피하면 천재지변이 없는 한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된다. 장하다.

초반 공격에 실패한 컴퓨터가 전열을 가다듬으며 재기를 노리고 있는 동안 우리는 힘을 합쳐 불쌍한 컴퓨터를 공격한다. 더 열심히 자원을 캐고 더 열심히 유닛을 생산한다. 해설도 하고 중계방송도 하고 작전도 짠다. (여기 스캔 한 번만 찍어줘. 알았어.)

컴퓨터와 게임을 하면 장점은 컴퓨터가 민첩하기는 하지만 워낙 멍청해서 웬만하면 우리가 이긴다는 것이다. 도박판에서 돈 잃고 속 좋은 놈 없듯, 게임판에서도 지고 기분 좋은 놈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기는 게임만 하는 것이다. 단점은 실력이 영 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컴퓨터는 절대 항복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컴퓨터와 겨루어서 이기려면 최후의 건물 하나까지 다 파괴시켜야만 하는데 수십 대의 탱크와 마린을 떼거지로 몰고가 방어력이 전혀 없는 컴퓨터의 마지막 보급창까지 모조리 없애고 있다 보면─이걸 전문용어로 엘리미네이트, 줄여서 엘리라고 한다─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건가, 하는 의식이 돌아오며 스스로가 한심해 지곤 하는 것이다. 괴롭다. 좋은 아빠는 하는 짓이 유치하다고 애써 자위해 보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다.

그때마다 컴퓨터도 gg를 칠 줄 알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책을 읽다가 다음 구절이 눈에 번쩍 들어왔던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얼마 전에 캐나다에서 있었던 컴퓨터 체스 대회에서, 승부가 나기 전에 시합을 끝내는 진귀한 속성을 가진 프로그램─경쟁품 중에서 성능이 가장 낮은─이 선을 보였다. 이 프로그램은 체스를 썩 잘 두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판세가 희망이 없으면, 그 다음 수를 생각하는 지리멸렬한 장고를 늘어놓는 여타 프로그램들과는 달리 즉시 시합을 포기할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지기는 하지만 품위를 지킨다고 할까.”

책 제목은 밝히고 싶지 않고, 문단의 소 타이틀이 “체계로부터 벗어나기”라는 것만 적어둔다.

p.s.
다음의 인용문은 과거의 독서의 기억을 더듬어 다른 책에서 찾아 낸 것이다. 그 과정이 어렵지는 않았다. 책 말미의 인명 색인에서 괴델을 찾아 해당 페이지로 직행 했으니까.

“오스트리아의 수리논리학자인 쿠르트 괴델은 공리들의 체계가 결코 자체에 기반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했다. 일관성이 입증되려면 그 체계 밖에서 나온 진술을 이용해야 한다. ‘괴델의 정리(定理)’에 비추어볼 때 비모순적이고 내적으로 일관된 세계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Posted in 블루 노트.

2 Comments

  1. 잘 안 던지는 걸로는 조훈현이 유명하지요…상대편은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으면서도 상대가 조훈현이다 보니, 심리적으로 계속 쫓기게 되고 실수 몇번 하게 되면 결국 다 이긴 바둑을 내어주는 결과를 초래하지요…뭐 ‘조훈현’이라는 네임 밸류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지만서두…

    스타에서는 또 안 던지는 걸로 임요환이 유명하지요…다 진 게임도 악착같이 버티고 버텨서 말도 안되는 역전승 하는 걸 몇번 본 적이 있지요…그건 뭐 다 깨져도 커맨드 센터를 들어올릴 수 있는 ‘테란’이라는 종족의 특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만서두…

    암튼 잘 나가는 넘 중엔 품위하고 담 쌓은 넘들이 참 많다는 말씀…

  2. 이형기의 낙화가 생각나는구랴.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로 시작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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