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아이러니는 웃긴다

반성 16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글씨가 보였다.

─ 김영승 ‘반성 16’ 전문

아이러니는 쉽게 원래 의도한 의미와는 반대되는 의미를 가지는 말을 사용하는 걸 말한다. 즉 표층의 의미와 저층의 의미가 다르다.

우리가 서로 잘 사귀다가, 서로 또 심통이 나서 헤어지게 되었을 때 ‘너 잘 났다. 잘 먹고 잘 살아라’고 말한다면 말해지는 의미는 말하는 사람이 의미하는 의미와는 반대가 된다. 이런 경우 ‘잘 먹고 잘 살아라’라는 말을 들으면 아주 기분이 나빠진다.
이렇게 말에 의한 아이러니를 언어의 아이러니(verbal irony)라고 한다.

아이러니는 또한 행동과 그 행동의 결과가 상반되거나, 겉모습과 실재가 서로 상반되는 것을 말한다. 가령, 독립기념관을 짓는다면서 일본의 건축자재를 사용하는 것 등이 그렇다.

고종석의 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말에서 일본어를 몰아내자는 순수주의자의 멋진 글들도 일본에서 온 말들로 이뤄져 있다.”*

그게 무슨 영화더라. 딱지 끊은 경찰이 거스름돈 안 거슬러 주자 확성기 들고 경찰차 따라가면서 거스름돈 내 놓으라고 하던 영화는?

아기공룡 둘리는 멍청하면서도 정 많은 ‘고길동’ 아저씨네 빈대 붙어 산다. 둘리가 자기 친구들에게 ―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둘리는 꼭 저 같은 놈들만 사귄다.― 길동이 아저씨를 얘기할 때는 꼭 이렇게 말한다. 즉, 친구가 ‘저 사람은 누구니?’ 하면 ‘응, 내 애완동물!’

밖에 상황의 아이러니(situation irony)도 있고, 낭만적 아이러니(romantic irony)라고 하는 것도 있고, 소크라테스가 어린 중생들을 계도하기 위해서 사용한 소크라테스 아이러니(socrates irony)라는 것도 있고, 드라마틱 아이러니(dramatic irony)라는 것도 있다. 각자 알아서 공부하시기 바란다. 다시 말하지만 남을 웃기려면 공부 열심해 해야한다.

참고로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는 문학용어 사전을 보니 아래와 같이 나와 있다. 번역은 또 각자 알아서 하시기 바란다.

Socratic irony So called after Socrates whose favorite device was to stimulate ignorance in discussion, especially by asking a series of apparently innocuous questions in order to trap his interlocutor into error.

어느 날 동생이가 말했다.
__형, 형이가 내 일기장 훔쳐봤지?
형이 대답했다.
__아니!
동생이가 말했다.
__거짓부렁 마. 내가 형 일기장 훔쳐보니까 형이가 내 일기장 훔쳐봤다고 써있었어.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축제>라는 영화는 이런 영화다.

할머니의 키가 작아지는 것은 당신의 후손들에게 자신의 나이와 지혜를 나눠주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 다큐멘터리적인 냉철함과 동화적인 정감을 교차하면서 죽음과 효에 대해 말한다. 40대의 명망있는 작가 이준섭은 5년이 넘게 치매를 앓아온 시골의 노모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분주하게 고향을 찾는다. 87살 할머니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제각기 다른 감정으로 다가간다. 특히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손수 모셔온 형수의 감정은 홀가분함과 애석함이 교차한다. 한편 준섭의 모친상을 통해 그의 문학 세계를 재조명하는 기사를 쓰러 온 기자 장혜림은 장례식의 이모저모를 취재하기에 바쁘다. 장례가 시작되고, 어머니의 죽음을 놓고 생기던 골이 깊어만 간다. 그러나 장례식이 진행되면서 가족들의 갈등은 서서히 풀리고, 할머니를 모시지 않은 삼촌 준섭을 원망하던 용순은 준섭이 쓴 동화를 읽고 눈물을 흘린다. 장례가 끝나자 가족들 각자는 노모가 남겨준 큰 사랑과 삶의 지혜를 간직하게 된다. 96년 청룡영화상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수상작.

─ http://www.cine21.co.kr/Db-104/sbject_search03.c21?id=32

본 지가 오래되서 가물가물 하지만 내 기억에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다.

초상을 치룬 사람들이 모두 모여 사진을 한 장 박는다. 얼굴 표정이 모두 죽상이다. 이때 누군가 한마디 한다. 안성기 였던가?

왜 그렇게 시무룩하냐? 누구네 초상났냐?

그러자 사람들 모두 활짝 웃는다. 찰칵!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한바탕의 축제! 아이러니한 제목이다.

 
 
 
* 고종석 지음, <감염된 언어>, 개마고원, p98

Posted in 웃기기.

0 Comments

  1. 딱지 끊은 경찰이 거스름돈 안주자 쫓아가면서 달라고 하는 영화는

    초록물고기

    가 아닌가 싶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한석규, 심혜진 주연

  2. 언젠가 나는 말했다…
    내가 아무리 책 욕심이 없어 책을 다 퍼주는 사람이지만,
    용서할 수 없는 인간이 하나 있다…
    김영승의 ‘반성’ 가져간 넘…

    그 책 출판된지 얼마 안되어서 금서가 되었던가? 기억이 가물거리는데…
    절판이 되었단 말이지…그래서 다시 구할래도 구할 수 없는 희귀한 책…
    아 초절정백수의 존귀한 세계관으로 빛나던 그 책….
    지금쯤 어디서 뒹굴고 있는지…

  3.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해”라고 부지불식 간에 말해버린 것은…
    아이러니인가? 거짓말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죽어도 “사랑해”라고 말 못 하는 것은….
    아이러니인가? 소심함인가?

  4.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해”라고 부지불식 간에 말해버린 것은…
    어차피 헤어질 걸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걸식님의 철저한 직업정신이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죽어도 “사랑해”라고 말 못하는 것은…
    함께 살 걸과의 향후 기싸움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걸식님의 작전이 아닐까요?

  5. sea69님의 탁월한 해석에 한 표.

    걸식이님/ 김영승의 반성 우리집에 한 권있는데 사시겠소? “영승이”는 얼마 전에 “무소유 보다 찬란한 극빈”이라는 제목으로 시집 한권 더 냈다우. 아쉬운 대로 그거라도 사 보시던지. 아, 글고 도대체 왜 “직선 위에서 떨다.” 저자 사인본은 안 주시는 게유?

  6. 따위님/
    김영승의 이후 시집을 보았으나, 영 마음에 안 찼다오…새로 나온 시집도 그러하리라 짐작되오…그리고 설마 책 욕심으로 이 세상에서 누구에게 둘째 가라면 서러울 따위님께서 책을 파시다니요…믿기진 않지만 그것이 진정 따위님의 뜻이라면…값 매기기도 참 거시기하니…제 서가에 있는 책 중 한권과 1대1 교환을 제안하는 바이오…(물론, The Body 빼고…)

    글구 시인의 싸인본은 저도 시인 본지가 넘 오래되어서…다시 만난다 해도 그 사실을 기억해낼리 만무하니…언제 시인과 함께 술 한잔 하는 자리를 마련해보도록 하지요…요즘 시인께서는 별 일 없으면 내각리에 은둔하고 계시니…언제 시인의 마을 내각리 한번 둘러보러 가시든가…

  7. 제 기억으로는…
    트럭에 뭐 싣고 팔러다니는 형과 막둥이(한석규)가 교통위반에 걸려서…
    경찰에게 살짝 뇌물 먹이고 나서…
    그 경찰차를 쫓아가며 확성기로 막 떠들어대는 장면인데….
    그 내용이…거스름돈 내놓으라는 거였나요?
    암튼….’초록물고기’는 맞는 것으로 보이오….

  8. 걸식이님/ 허허. “반성”은 그깐 “바디”와도 바꾸지 않소. “반성”은 그거보다 훨 비싸오. 걸식이님 서가에 그나마 쓸만한 건 “바디” 딱 한권인데… 왜, 옛말에도 있지 않소? 열 바디가 한 반성 못당한다는…

    내각리에는 코레아의 거시기들 프로젝트 “인터뷰”차 가면 영광이겠구랴. 글고, 그게 초록불고기구랴. 알겠소. 초록불고기.

    암튼 아침부터 비가 참 짠하고 찡하게 오는구랴. 이런 날에는 거리가 내려다 보이는 창넓은 카페에서 뜨거운 체리차를 마시면서 시시껄렁한 얘기나 해야하는 거인데…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