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베른하르트(지음), 윤선아(옮김),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현암사, 1997
포스코센터와 같은 이름 있는 건물에서 일을 할 때의 장점은 ‘좋은 건물에서 일하니 다니는 회사도 좋겠고 월급도 많이 받겠다’는 식의, 말하자면 ‘있어 보이는’ 이미지의 효과도 있겠으나 그런 거 말고도 당장 ‘퀵서비스’를 이용할 때 편리하다. 어디라고 설명할 필요가 전혀 없으니 오토바이맨과의 소통이 쉽다. 반면에 지금 있는 사무실의 위치를 설명하려면 아주 구차해진다. “신촌기차역 아세요?”로 시작하거나 아니면 “이대역에서 신촌역 방향으로 가다가 첫 번째 나오는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해서는 ~” 대개는 근처에서 와서 다시 전화를 걸어온다. “예, 거기 따위넷(가명)이라고 적혀있는 오렌지색 간판보이세요? 예, 그 옆에 작은 골목이 하나 있는 데요, 그 안으로 한 50미터쯤 들어오시면~” 또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해주어야 한다. 한두 번도 아니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통화가 이루어진다. 이게 다 무명의 설움이다. 이렇게 존재의 위치는 이미 알려져 있는 것과의 관계에 의해서 규정된다.
이건 비단 지리적 위치의 문제만은 아니다. ‘내가 누구인가’하는 실존적 물음에 대한 답도 그러하다. 딸아이의 유치원에 가서 내가 누구인지 밝힐 적에는 딴소리 다 필요 없고 오직 하나 ‘나우 아빠’라는 말이면 된다. 혹시 내가 살아생전이든 죽어사후든 아주 유명해진다면 나우에게는 ‘따위의 딸’이라는 라떼르가 따라다닐 수도 있겠지만, 행여나 이제나 저제나 그럴 일은 거의 없어 보이니 이제는 그나마 ‘나우 아빠’ 소리라도 제대로 듣기 위해서 딸 뒷바라지나 열심히 하는 게 맞는 거 같다. 이쯤 하고.
이 책의 주인공은 파울 비트겐슈타인인데 모르는 이름이다. 해서 이 사람이 누군지 알려면 ‘이 사람과 관계가 있는 이미 알려진 어떤 존재’가 필요하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아는 이름이다. 유명한 철학자다.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여야 한다.” “한 단어의 의미는 언어 속에서의 사용이다.” “철학은 병 속에 든 파리를 병 밖으로 꺼내주는 것” 등의 말을 했다.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다. 이제 됐다.
이 책의 지은이는 토마스 베른하르트인데 역시 모르는 이름이다. 누구인지 밝혀보자.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인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둘도 없는 친구’이다. 이제 됐다. 이 책은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기록한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삶과 둘 사이의 우정에 대한 기록, 즉 “메모”이다. 소설이 아니다.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삶. 극적이고 비극적이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비트겐슈타인家門에서 이른바 ‘로얄 패밀리’의 한 사람으로 태어나 저 가진 거 다 남을 주어버리고 “더는 가난해 질수 없을 정도로 무일푼이” 되었고, 정신병원을 제집 드나들 듯하며 평생을 살았다.
광기. 중요한 건 이거다.
그는 먼저 “입석표를 사서라도 날마다 즐겨 오페라를 관람하러 가던 오페라광이었다. 죽을 만큼 아프던 그가 여섯 시간이나 걸리는 트리스탄 공연을 끝까지 서서 보았고, 공연히 끝난 후에도 큰 소리로 브라보를 외치거나 야유의 휘파람을 불 힘이 남아 있었다. 링가도에 있는 오페라 하우스에서 관람한 사람 중에서 그만큼 크게 브라보를 외치거나 야유의 휘파람을 분 사람은 그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그가 “맨 먼저 브라보를 외치거나 아니면 휘파람으로 야유”를 하느냐에 따라서 그 오페라의 흥행이 좌우되었다. “그러나 어떤 오페라 공연이 그의 맘에 들고 어떤 것이 맘에 들지 않는지는 객관성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단지 그의 기분과 변덕 그리고 광기가 그것을 결정했다.”
“우리가 아는 모든 미친 철학자의 머리도 결국에는 정신력을 빠른 속도로 내던지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에 폭발한 것이다. 그들의 정신력은 끊임없이 (그들 머리의) 창밖으로 내던지는 정신력의 속도보다 훨씬 빠르고 잔인한 속도로 생겨나며, 어느 날 그들의 머리는 폭발하게 되고 그들은 죽어 버린다. 파울 역시 어느 날 그렇게 폭발했고, 죽었다.” 그러니 미치지 않기 위해서는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부지런히 머리의 창밖으로 던져버려야 한다. 어쩌면 술 먹고 중얼거리는 사람들도 미치지 않기 위한 안간힘으로 그렇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술 먹고 제흥에 겨워 뭐라뭐라 중얼거리면 이렇게 좋게 봐주라. 전혀 좋게 봐줄 게 아니라고 그저 고약한 술버릇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날 때부터 삐딱한 사람은 지금 당장 아무 처세서나 들쳐보라.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라고 나와 있다. 아무렴. 또 이쯤하고.
저런 광기가 나타나는 모습은 다양하다. “우리 둘에게는 …… 또 하나의 광기가 있었는데 그건 이른바 세는 병이었다. ……. 예를 들어 나[작가]는 …… 전차를 타고 시내로 들어갈 때면 창밖을 내다보며 건물 유리창 사이의 방, 유리창이나 문 혹은 문 사이의 방 수를 세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그리고 전차가 빨리 달리면 달릴수록 그만큼 더 빨리 세야 한다. 거의 미쳐 버릴 때까지 세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전차를 타고 빈이나 다른 도시를 돌아다닐 때 세는 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창 밖을 내다보지 않고 눈길을 바닥 쪽으로 돌리는 습관을 들였다.” 파울의 세는 병은 이보다 정도가 훨씬 심했다. 파울은 또한 “보도블록을 남들처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내디디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정확하게 규정된 체계에 따라 내디디는 습관이 있었는데…….그러니까 예를 들어 정확하게 보도블록 두 개를 완전히 지나서 세 번째 보도블록에서 발을 내디디되 그냥 생각 없이 보도블록 한가운데 발을 내디디는 것이 아니라 보도블록 맨 아래쪽이나 아니면 맨 위쪽에 정확하게 발을 내디뎌야 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인생이 피곤하다 아니할 수 없다.
광기에 가득 찬 삶은 결국은 이렇게 되는 건가. “……제대로 된 대화 역시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아무리 들어도 앞뒤 맥락이 맞지 않은 끊어진 문장을 나열하며 말했다.” 이쯤 되면 아니 할 말로 “미쳐도 곱게 미치지”는 못한 셈이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존 내시는 특이한 경우이다. 그는 자신에게 노벨상 수상 소식을 전하러 온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미쳤어요.I am crazy.” 미친 자가 스스로 미쳤다고 말하는 이 장면은 아이러니 하다. 크레타 섬의 모든 주민은 다 거짓말 장이라는 역설이 생각난다.
존 내시가 미친 상태에서 미치지 않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취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건 선택하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실재하지 않는 것을 보지만(but I still see things that are not here.) 그는 그것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을 선택한다.(I just choose not to acknowledge them.) 이 선택이란 일종의 마음의 다이어트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like a diet of the mind.) 그의 정신의 입맛을 돋구는 최대의 식욕(욕망)은 패턴이다.(like my appetite for patterns).
정리하자면 그는 자신이 패턴에 대한 욕망에 탐닉하면 미친다는 걸 의식하고 있는, 하여 미치지 않기를 선택 ─ 선택, 이제 중요한 건 광기가 아니다. 선택이다. ─ 할 수 있는, 참으로 곱게 미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본인이야 어쩌면 미친 사람보다 더 힘들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미친 자는 스스로가 미쳤다는 의식이 없고, 미칠 것만 같은,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미치지 못한 자는 미친 자를 안타까워하거나 혹시는 부러워할 뿐이다. 팝송 ‘빈센트’의 가사가 생각난다. 그들은 여전히 ‘듣지’ 않고 어쩌면 영원히 ‘듣지’ 않을 것이라는……
And now I think I know
What you tried to say to me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And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re not listening still
perhaps they never will
사족 하나:
토마스 베른하르트를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친구로서만 기억하는 건 그에 대한 제대로 된 자리매김은 아닐 것이다. 소설 “혼란(1967)” “바텐(1969)” “옛 거장들(1985)” “한 아이(1982)”, 희곡 “사냥 클럽(1974)”, 시집 “이 세상과 지옥에서(1957)” 등의 작가로 기억하는 것이 올바른 길일 터인데……문제는 저 작품들을 내가 어느 세월에 읽어보겠느냐는 것이다. 어쩌면 소설 제목에 ‘비트겐슈타인’이 들어간다는 이유만으로 이 책을 집어든 것이 잘못일런지도 모른다.
사족 둘: 본문은 9페이지에서 시작해서 136페이지에서 끝나는 데, 본문전체가 단 하나의 파라그래프로 이루어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