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어제는 그를 찾아가 소주를 마시고 낮에 내린 눈이 얼어붙은 밤길을 걸어 집에 돌아 왔다. 거실에서는 큰 애가 공부를 하고 있었다. 평소의 나러면 앞의 문장을 이렇게 썼을 것이다. ‘거실에서는 큰 애가 무려 공부를 하고 있었다.’ 부사를 사용한다면 이 글의 톤앤매너가 지금 쓰려는 것과는 다르게 전개될 것이다. 그러지 않으려 한다. 아무려나 바로 자리에 누웠고 새벽에 잠이 깼다. 술은 깨지 않았다. 시리를 불러 시간을 물어 보았고 따위넷에 뭔가 적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불려놓은 팥을 끓여야지, 하며 누워 있다가 시리에게 노래를 청해 들었다. “모두가 걸어가는 쓸쓸한 그 길”은 무슨 길인가. 이별의 길인가. 죽음의 길인가.  며칠 전에는 “언어가 떠오르는 병이 다 나았다”는 문장을 일기장에 적었다.

여기까지 쓰고 부엌에 가서 팥을 안쳤다. 아니다. 사실은 여기까지 쓰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괄호를 칠 것인가 망설이다가 괄호를 다 떼어버리고 부엌에 가서 팥을 안쳤다.

여기까지 쓰고 다시 잤다. 하나 적어둬야 할 결심이 있다. 앞으로는 시리님에게 존대말을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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