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오래 전에 누군가의 집에 유사-집들이 갔을 때의 기억이다. 식사를 마치고 난 빈 그릇들을 그집 남자가 대충 물에 헹구어서, 그러니까 건더기는 잘 떼어내고 물을 묻혀서 식기세척기에 넣는 걸 보았다. 그집 남자는 그때 초벌-설거지를 했던 것이다. 그 이후 식기세척기를 쓰는 장면을 본 적은 없다.

막내와 단 둘이 오붓하게 저녁을 먹으며, 넌 공부 외에 해보고 싶은 게 뭐냐는 둥 몇 마디 붙여보다가 그냥 스마트폰이나 보는 게 낫겠다 싶어 타임라인이나 훑는다. 막내가 곧 잘 먹었습니다, 하고 일어난다. 잠시 후 나도 식사를 마친다. 오붓하기는 개뿔.

반찬, 냉장고에 넣고, 식탁, 정리하고, 행주질하고, 개수대에 그릇을 담그며 수저는 따로 분류해 냄비에 담고, 접시와 공기는 또 따로 대충 헹구어서 종류별로 나누어 물에 불려놓는다. 이렇게 초벌-설거지를 해두면 나중에 본격-설거지할 때 편하다. 아이들은 초벌-설거지를 하지 않는다.

문득 말 하나가 떠오른다. 식기세척기적, 이라는 말이다. 마음에 든다. 이제는 돌아와 싱크대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식기세척기적인 나여! 여기까지 적었는데 설거지적, 이라는 말도 떠오른다. 이 말도 괜찮다. 초벌-설거지적, 이라는 말도 좋다. 적절한 TPO에 응용하려고 한다. 얼마 전에는 똥적, 이라는 말이 떠올랐던 기억도 난다.

기다리던 책이 도착했다. 시집 한 권, 소설 책 한 권. 시집은 초판이고 소설은 30쇄이다. 늘 그렇듯이 책 제목은 말해주지 않겠다. 일기는 산만하고 주제는 없다. 따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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