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남 글/사진, <<아름다움을 훔치다>>, 디새집, 2004
내 청년시절에 “징막회”가 있었다. 신경림의 시 <농무>의 첫구절 “징이 울린다 막이 내린다”에서 “징”자와 “막”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이름도 거창한 이 징막회가 뭐하는 모임이었느냐 술 먹는 모임이었다.
어떻게 보면 산다는 건 판을 벌이는 일일 것이다. 그게 무슨 판이든. 이땅의 많은 어미가 시장에 좌판을 벌여 자식들을 키웠고 이땅의 많은 아비가 도박판에서 가산을 탕진했다. 내가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 친구집에 모여 점에 10원으로 치던 고스톱판도 판은 판이다.
그러나 내가 징막회라는 이름으로 벌였던 술판이나 친구들과 벌였던 고스톱판은 판도 아니다. 저런 거 가지고 어디가서 판 벌였다고 말 하면 욕 먹기 딱 좋다. 판을 모독하는 발언인 것이다. 여기 진짜 판을 벌인 사람들이 있다. 가령 “1929년(스물네 살) [……]이때부터 집안일을 부인에게 맡긴 채 씨름판, 윷판, 소싸움판, 장기판, 투전판 등 놀이판을 찾아서 유랑생활을 했다.” 는 춤꾼 하보경 같은 이가 그렇다.
사진작가 김수남은 수십년 동안 이땅의 굿판과 춤판을 따라다니며 사람들과 어울리고 사진을 찍었다. 어떤 판인가? 차례를 보자.
제주 큰 심방 안사인, 그 몸을 통과하는 제주의 신들
1인 창무극의 공옥진, 인간의 껍질을 벗겨버리는 통증
한말 최후의 광대 이동안, 집시의 피
서해안 배연신굿의 김금화, 가슴속의 화로
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우르던 소리꾼 김소희, 조용한 통곡
도살풀이의 명무 김숙자, 토굴 속의 빛
범패와 영산재의 박송암, 극락을 향하는 소리
동해안굿의 신석남, 영혼을 부르는 하늬바람
승무의 한영숙, 허공을 사르는 곡선
가양금 산조의 명인 성금연, 진주처럼 모아놓은 눈물,
밀양 양반춤의 하보경, 사내 몸에 든 멋
모두 흑백 사진들이다. 어두운 계조와 강한 콘트라스트, 광각의 로우 앵글과 거친 입자들. 먹먹하고 아름답다. 프레임 가득 거친 바닷바람이 불고, 프레임 가득 통곡소리가 들리고, 프레임 가득 신명이 나고, 프레임 가득 고고하다.
내 인생은 무슨 판을 벌여야 하나? 요즘은 진짜 술판도 잘 안벌어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