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버스 정류장에서

딸아이가 내 비만의 본체에 올라타 쿵쾅거리며 나를 부팅하는 아침 마음이여, 다시 켜졌구나 지난 밤에도 나는 어딘가로 누군가에게로 치달았을 것이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 서로 딴 생각하며,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버스를 기다리는 가을 아침의 정류장에도 지난 밤 내 마음의 갈대밭에 불던 쓸쓸한 바람이 불고 은행나무에서 졸속으로 터져 나온 낙엽들, 차들이 지나가며 일으킨 파장 속으로 붕 떠올랐다가 도로 양 사이드 경계석 밑으로 밀려나며 착지한다 생각해 보니 오직 나로만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걸 나는 너무 오랫동안 끔찍해했구나 언제든 어디서든 바람이 저 혼자 이리저리 부는 게 오류가 아니듯 내가 나로 사는 게 오류가 아니기를 수천 RPM의 자의식으로 기원하는 아침, 저기 버스가 온다 나를 신촌으로 실어갈 버스가 온다 나는 이 정류장에 나를 남겨두고 저 버스를 타고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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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Comments

  1. 정류장에만 세워놓고 오신 게 아니오.
    이글.
    낮에는 대문에 있더니
    지금은 한 번을 더 클릭해야 들어올 수 있는 뒷구석에 쳐박아(?)두셨군요.
    다른 이들은 어느 문맥에서 가슴을 치는지…
    나는 이 대목이 영 목에 걸립니다.
    ‘생각해 보니 오직 나로만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걸 나는 너무 오랫동안 끔찍해했구나……
    내가 나로 사는 게 오류가 아니기를…..’

  2. 목에 걸린다, 하시니 한 성우의 어이없는 죽음이 떠오릅니다.
    해서 더 깊이 쳐박아 둬야겠습니다.
    사실은 제 블로그가 제 맘에 들지 않아서
    이걸 어째야 하나 하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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