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소설집, <<오빠가 돌아 왔다>>, 창비, 2004, 3쇄
“오빠가 돌아왔다.” 왜 왔냐? 이 지긋지긋한 집구석으로 왜 왔냐? 왜 돌아왔냐? 가출 전엔 세탁기에서 지 여동생 팬티나 훔치며 온갖 변태짓을 다 하더니만, 이제는 어서 “못생긴 여자애 하나를 달고” 기어 들어와서는 들어오는 그날로 지 아버지를 야구망망이로 두들겨 패? 잘 한다. 잘 해. 아주 잘 하는 짓이다. 집안 돌아가는 게 꼭 ‘대한관습헌법민주씨발공화국’ 같다.
김영하 소설집이다. 총 8편의 소설이 실렸다. 다음과 같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문학동네 2003년 봄호
오빠가 돌아왔다…..현대문학 2002년 1월호
크리스마스 캐럴…..현대문학 2001년 1월호
너를 사랑하고도…..문학수첩 2003년 봄호
이사…..문예중앙 2002년 여름호
너의 의미…..문학과사회 2002년 겨울호
마지막 손님…..한국일보 2003년 12월 31일
보물섬…..현대문학 2004년 1월호
이 중에서 “이사”, “너의 의미”, “보물섬”은 이미 읽은 바 있어서 이번에는 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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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따위 날림 독후감을 쓰는 거에 대해서 회의하고 있다. 그 동안 20여권의 책이 그나마 이 따위 날림 독후감도 받지 못한 채 잊혀져갔다. 아직도 회의하고 있다. 내가 이런 이런 책을 읽었다, 는 떠벌림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을까?
떠벌림이 아니라 욕구를 자극하기도 하죠.
가령 김영하에 대해서도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이거 맞나? 이거 달랑 한 권 보고 이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그걸로 끝.
나한테는 더이상 감흥을 기대할 수 없는 작가였는데
여기저기에서 남들이 ‘오빠가 돌아왔다’에 대한 독후감 써놓은 걸 보니 함 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충동으로 산 천운영의 ‘명랑’을 읽던 밤들은
꽤나 답답하긴 했지만요.
암튼 저도..김영하의 ‘포스트잇’ 얼렁 해치우고
‘오빠가 돌아왔다’를 빌려볼까 합니다.
( 사서 보고 싶은 책 리스트에는 못 오르고
빌려볼 책 리스트에 올랐음 :))
음.. 적고보니 떠벌리는 댓글 푸푸.
자신이 읽고 있고, 보고 있음을 …
또 외롭고 좌절중이며 복잡함을…떠벌리고 싶어하는 이들이 그간 블로그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요?
(나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불행과 괴로움을 시위하고 싶어하는 건
그것 또한 인간됨의 속성이 아닐까..
뭐 그런 생각도 해보면서
조금만 결벽을 털어내시라구요..
음.. 전 아무래도 따위님 닮아가서
실없는 소리만 느는듯. 도망 가자
천운영의 신춘문예당선작 ‘바늘(인가요?)’을 신문에서 읽던 기억이 납니다. 읽으면서 징그럽다, 했지요. 뭐 지렁이처럼 징그러운게 아니라 가령 어떤 바이올니스트가 연주를 기가 막히게 잘하면 징그럽게 잘한다 할 때의 그런 징그러움이었습니다. 소설 자체가 좋았다기 보다는 그이 문장과 묘사가 그랬습니다.
‘명랑’이라. 여기저기서 눈에 띄는데 나중에 읽게 되겠지요.
“자신의 불행과 외로움을 시위”한다는 표현. 이거 켕기는 군요. 이 욕망, 이거 예전에 제가 “노출증”이라고 불렀던 것인데, 잊고 있다가 생각났습니다. 맞다. 나에게 노출증이 있었지. 한편으로는 “나”를 들키고 싶지 않은 심정도 있었으니 그걸 “은폐”라 했습니다.
하여 무얼 해도 ─ 일을 해도 술을 마셔도 사람들을 만나도 영화를 봐도 ─ 항상 “은폐와 노출 사이”를 분주하게 왔다리갔다리 하던 “자아”를 컨트롤 하느라 “의식의 증유가 미친듯이 출렁거(이 표현은 기형도의 것입니다)”렸지요.
그리고 넌꾸님은 “실없는 소리”가 이런 소리인가요? 제 실없는 소리와 질적으로 다르군요. 수준 차이가 확 느껴집니다. 그 수준으로 “실있는 소리”를 하시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