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아의 제야

고종석(지음), <<엘리아의 제야>>, 문학과지성사, 2003

잘라 말한다. 얘기꾼으로서의 고종석은 실망스럽다. 이 소설집은 지은이의 ‘자기 목소리’의 동어반복이다. 그 ‘목소리’는 내가 <감염된 언어>나 <서얼단상>이나 강준만의 <인물과 사상> 등에서 들었던 목소리다. 다른 이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의 전작 <기자들>이나 <제망매>를 읽어보지 않아 이 판단은 섣부를 수 있다. 문제는 그의 전작들을 읽고 싶은 마음이 동하질 않는다는 것.

말미에 김병익의 해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그는 마침내, 인문주의자에서 소설가로서의 운명을 이루어낸 것이다.” 이 문장은 좀 민망하다. 뭐, 어차피 덕담이겠지만.

꿈을 볶는 커피집 ‘비미남경 이야기’

이동진 지음, <<꿈을 볶는 커피집 ‘비미남경 이야기’>>, YoungJin.com, 2004

내가 다닌 고등학교 앞에는 ‘태평양’이라는 이름의 다방이 있었다. 이름이야 너른 바다를 따서 한없이 넓었지만 그 안은 늘 아이들로 북적거렸고, 해서 좁아터졌고, 어두컴컴했고, 담배연기가 자욱했고, 음악소리가 시끄러웠다. 그곳에서 나는 뻐끔 담배를 피웠고 커피를 마셨다. 다방커피. 그것도 없어 못 마셨다. 대개는 커피 한잔 시켜놓고 친구들과 오랫동안 ‘꼰대’들 흉을 보거나 ‘계집애들’ 얘기를 했다. 그러다가 당구장으로 농구장으로 혹시는 사다리를 타고 기어 올라가야 하는 다락방 같은 술집으로 낮술을 마시러 가곤 했다.

내가 살던 동네에는 ‘약속다방’이라는 이름의 다방이 있었다. ‘태평양’까지 가기가 귀찮을 때 더러 그곳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역시나 다방커피. 그곳에 모여 지리산으로의 겨울여행을 모의하기도 했고, 함께 지리산에 다녀온 친구의 부음을 듣기도 했다.

내가 다니던 군대 옆에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다방’이 있었다. — 그래 나 방위다. 어쩔래? — 방위에게 딱 어울리는 특수임무를 맡은 나는 오전에 부대 밖으로 외출을 나왔다가 그 다방으로 기어들어가서 시간을 죽이곤 했다. 다방커피를 마시면서. 내가 할 줄 아는 몇 개 안 되는 재주 중의 하나인 금붕어와 대화하는 법도 그때 익힌 것이다. 플라스틱 해초가 넘실대는 어항속의 금붕어 신세나 팔팔 피끓는 청춘으로 군대 출퇴근해야 하는 내 신세나 거기서 거기라서였을까. 우리는, 내 말은 그러니까 금붕어와 나는, 어쩌면 말이 통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디 이뿐이랴. 그동안 내가 스쳐왔거나 나를 스쳐간 그 많은 역전다방, 독다방, 티롱다방, 음악다방들이여! 거기서 내가 마셨던 다방커피들이여! (웬 느낌표) 솔직히 커피 마실 돈 있으면 그 돈으로 소주 한 병 마시는 게 훨씬 나았던 시절이었다. 나는 미팅하면서 마시는 커피 값이 세상에서 젤로 아까웠다. 술이 몇 병인데…

질 좋은 커피에 대한 책을 읽으니, 질 나쁜 커피를 마셔대던 지난 시절이 떠올라 몇 마디 떠들었다. 각설하고.

이 책은 이대 앞 대한민국 스타벅스 1호점의 “맞은 편 계단 골목 밑”에서 ‘비미남경’이라는 이름의 커피집(혹은 커피 하우스)을 운영하는 저자의 커피사랑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백화점 입점이니 좋은 원두공급이니 하는 건 잘 모르겠고 커피에 관한 한 참 지극정성이다, 싶다. 몇 구절 인용하고 땡치고, 이따위 날림 독후감 쓰느니 가서 찐한 커피 한 잔 쓸쓸하게 마시며 청승이나 떨다가 오는 게 낫겠다. 사무실에서 멀지도 않고. 뭐 때마침 장마비도 추적추적 오고. 비온다고 술먹자는 놈도 없고.

“시중에서 유통되는 원두커피 중 블루마운틴이라고 이름 붙어있는 것의 90%이상은 가짜이거나 블루마운틴을 아주 소량만 섞은 블렌딩 커피일 가능성이 크다. 유명 백화점에서도 블루마운틴 블렌딩 커피를 100% 블루마운틴 진품인 양 당당히 팔고 있는 형편이니 일반 시중에서는 어련하겠는가.”

“우리가 잘 아는 ‘헤이즐럿 커피’의 ‘헤이즐럿’도 실은 커피의 한 종류가 아니라 개암나무의 열매이다. 게다가 헤이즐럿 커피의 경우 천연 개암나무 열매의 향이 아닌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화학적 향기를 입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 커피 문화의 형성은 독특한 면을 지니고 있다. 한국은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인스턴트커피가 시장 점유율이 원두커피보다 높은 나라이다. 실제로 인스턴트커피가 시장의 95% 시상을 차지하고 있으니 가히 압도적인 우위를 점령하고 있다고 하겠다. 원두커피 시장인 5%도 스타벅스가 한국에 들어와 테이크아웃 커피의 열풍을 일으켜 그나마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인스턴트커피의 편리함도 이유가 되겠지만 한국전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스턴트커피라는 상품이 세계최초로 상용화 된 나라가 한국이며 첫 시험 무대가 한국전쟁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p.s.
커피집 이름이 저 모양으로 해괴괴상요상망측한 이유는 이렇다더라.
“비미남경(妃美男慶)은 1998년 일본의 커피장인 호시노씨의 도움을 받아 재일교포 마쯔바라씨가 처음 세웠다. 커피집을 떠올리기 힘든 이 비범한 이름은 바쯔바라씨의 자녀들 이름을 한 자씩 따서 만든 것으로, 여기에는 자녀들이 훗날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곳이 자신의 뿌리임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마쯔바라씨의 뭉클한 고국사랑이 담겨있다.”

빈정거려서 미안타만 참 고국사랑하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비미남경이 뭐야. 비미남경이. 마케팅의 기본은 brand naming인데, 이름을 저 따위로 해가지고서는, 그래도 뭐 장사만 잘 된다고 하니 할 말은 웂지만서두.

빵 굽는 타자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빵굽는 타자기: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Hand to Mouth: A Chronicle of Early Failure >>, 열린책들, 2000

한글제목 “빵 굽는 타자기”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는 의미의 원제 “Hand to Mouth”처럼 직접적이지 않다. 직접적이지 않은 만큼 낭만적이다. 그만큼 배고픔의 절실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렇다. 그러니 제목을 적나라하게 까발려 보자. 빵은 ‘밥’을 넘어 ‘생계’를 지나 ‘생존 그 자체’를 뜻하는 환유이고 타자기는 ‘글을 쓴다.’는 행위를 의미하는 환유이다. 이 두 겹의 환유를 걷어내면 의미는 명확하다. 이렇게 해보자. “글 써서 밥 벌어먹고 살기” 됐다. 책 제목으로는 멋대가리 하나도 없지만 느끼한 낭만은 쪽 빼고 팍팍한 건더기만 남았다, 고 치자. 혹 너무 평이 하다 생각이 들면 조금 고상하게 “생존의 글쓰기”라고 해도 되고.

자, “내 꿈은 처음부터 오직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작가 말이다. 의사도 아니고 변호사도 아니고 과학자도 아니고 작가 말이다. 그러나 “글만 써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 비바람 막아 줄 방 한칸 없이 떠돌다 굶어 죽지 않으려면, 일찌감치 작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안다. 내가 그것도 모르고 작가가 된다고 했겠나?

그 모든 걸 다 알면서도 작가가 되겠다고? 왜? 도대체 작가가 뭐 길래? 언제나 그렇듯 이 “왜?”에 대한 대답은 각자의 몫이다.

젊은 날, 그는 열심히 쓴다.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쓴다. 시도 쓰고 평론도 쓰고 소설도 쓰고 희곡도 쓰고. 배도 타고, 여행도 하고, 번역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하면서 쓰고 또 쓴다. 늘 하루 벌어 하루 먹으면서도 그는 굴하지 않고 쓴다. 쓴다. 쓰고 또 쓴다. 작가는 써야 작가니 쓴다.

그러다가 생활에 궁핍해지고 막판에 몰리자 딴 짓도 해본다. 일테면 카드야구게임을 개발해서 “일확천금할 꿈”을 꿨다가 좌절하기도 하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보내보기도 한다. 뭐 되는 일이 없다. 그래도 쓴다. 쓴다는 걸 멈출 수는 없다. 나는 작가가 될거다.

“나는 더 이상 일확천금을 꿈꾸지 않았다. 하루하루 성실히 일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 생존의 기회를 얻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는 전부였다.” 그리고 그는 또 쓴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자살로 위장한 살인 사건을 해결한다는 흔하디 흔한 탐정소설의 구조를 180도로 확 뒤집은 소설, 즉 타살인줄 알았는데 밝혀보니 자살로 끝나는 탐정소설을 하나 쓴다. 그러나 쓴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출판을 해야 한다. 출판도 쉽지 않다. 그 와중에 결혼 생활은 파경을 맞고 “원고는 비닐봉지에 처박힌 채 거의 잊혀진 상태”다. 또 4년의 세월이 흐른다. 그동안에도 그는 쓴다.

새로 출판사를 차리는 친구가 “혹시 쓸 만한 원고를 가지고 있느냐고” 묻길래 그 ‘비닐봉지에 든 원고’를 넘긴다. 원고를 넘겼지만 책을 만드는 일은 또 “2년 동안이나 지지부진”하다. 드디어, 바야흐로, 마침내, 파이널리 책이 나왔으나 책은 팔리지 않는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마지막으로 ‘페이퍼백’ 출판사에게 원고를 보내 본다. 죽을 때 죽더라고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심정이다. 쉬운 말로 못먹어도 고! 실랑이도 흥정도 속셈도 없이 계약을 하고 “단돈 9백 달러”를 손에 쥔다.

마지막 문장이 쓸쓸하다. “돈을 벌기 위해 책을 쓴다는 건 그런 것이다. 헐값에 팔아 치운다는 건 그런 것이다.”

에이, 또 그날 아침이 생각난다. 아, 두고두고 잊지 못하리. 간밤에 또 뭔 짓거리 하느라고 늦게 잠든 나를 깨우며 아내가 말했다. “자기야, 우리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아침형인간이 돼보자.” “싫어. 나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작가가 될 거야.” 내 대답을 들은 아내가 중얼거리며 나갔다. “작가는 작품이 있어야 작가지. 아무나 작가야.”

뉴욕 3부작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뉴욕 3부작 The New Your Trilogy>>, 열린책들, 2003

어느 날 평소 웬수처럼 친하게 지내던 카피라이터의 집에 놀러갔다. 뭐 하러? 술 마시러! 그날도 우리는 뭐 “인생 뭐 있나?” “노세, 노는 게 남는 거네.” 하며 시시껄렁한 얘기나 나누었다. 무슨 얘기 끝에 이 카피라이터가 나더러 책 한권을 내밀더니 가져가라 했다. 나는 됐다, 그랬다. 안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그 집에 드나들며 그의 책을 한 권 두 권 말하고도 집어가고 말 안하고도 집어가는 걸 알고 있던 터에 나까지 그런 탐욕의 대열에 합류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 그의 책이 우리 집에 딱 한 권 있기는 있다. 결국 나도 똥 묻은 개까지는 아니지만 겨 묻은 개정도는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 집에 빼오고 싶은 책이 아직도 한권 남아있다. The Body라고. 사진책이다. 치토스를 노리는 치타처럼, 언젠간 쌔벼오고 말거야.) 아무튼 그가 그때 날더러 가져가라던 책이 폴 오스터의 < <빵굽는 타자기>>였다. 나는 안 가져왔다. 속으로 참나, 빵 굽는 제빵기는 들어봤어도 빵 굽는 이상한 불량 타자기는 처음 들어봤다, 하면서.

결국 나중에 내 돈 주고 < <빵굽는 타자기>>를 사서 읽었다. 지금 그 책의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 독후감 다 쓰면 다시 읽어볼 참이다.) 다만 책 표지에 적혀 있던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라는 문구만 기억날 뿐이다.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라니!

내가 폴 오스터를 더 읽어 보기로 한 건 어느 블로그를 방문한 게 계기가 되었다. 어떻게 해서 그 블로그까지 흘러 들어가게 됐는지 이제 와서 알 길이 없지만, 해서 지금 다시 찾아갈 수도 없지만, 그 블로거가 자랑처럼 찍어서 올린 책꽂이 사진에는 폴 오스터의 책들만 빼곡히 꽂혀있었다. 폴 오스터? 난 별루 재미 못 봤는데 이 정도로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니, 내가 그를 지나치게 저평가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택한 책이 이 책이다. < <뉴욕 3부작>>

3부작이니 세 편의 소설이 있다. “유리의 도시” “유령들” “잠겨 있는 방” 제목들부터 뭔가 있을 것 같다. 뭐 소설 제목들이 다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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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찍은 사진 한 장

글과 사진 윤광준, <<잘 찍은 사진 한 장: 윤광준의 사진 이야기>>, 웅진닷컴, 2002

잘 찍은 사진 한 장이 뭐가 어떻다구? 사람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기라도 한다구? 아님 어느 날 지구를 역회전시키기라도 한다구? 성격상 시비 먼저 걸었다. 시비 아직 안 끝났다. 포에틱하게 제목 짓느라 누군지 고생깨나 했겠다. 이 책의 컨셉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건 오히려 부제다. 윤광준의 사진이야기. 윤광준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사진에 대해서 이것저것 이야기 한 책이다.

그런데 윤광준은 누구인가? 책날개의 저자 소개는 이렇게 시작된다. “오디로 평론가로 잘 알려진 윤광준의 본업은 사진작가이다.” 이런, 이런, 낭패다. 오디오 평론가로 잘 알려졌다는 데 나는 금시초문이니, 이 사람이 덜 알려졌거나 내가 시대에 뒤쳐진 인간이거나 둘 중 하나다. 오디오 분야는 내가 낙후된 분야이니 후자가 맞겠다. 됐다. 이쯤하자. 괜히 제목 가지고 시비를 거는 이유는 다른 부분은 시비 걸 게 별로 없어서다.

성실하게 썼다. 그만큼 이것저것 내용이 알차다. 책 중간 중간에 실린 사진도 좋다. 하긴 좋아야지 名色이 사진으로 밥 벌어 먹고 사는 프로 사진가인데 그게 안 좋으면 쓰겠냐?

다른 얘기는 관두고 여기서는 필카냐 디카냐 맞짱을 함 떠보자. “필름은 사진의 오리진”이라는 챕터의 한 구절을 보자. 그는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해서 “커다란 촬영 프로젝트”를 진행해보고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효율성과 편리를 선택한 대가치고는 그 후유증이 너무 컸다. 인쇄물의 결과는 고객의 불만으로 이어졌고, 그 다음은 자연스럽게 작업 의뢰 중단이란 현실적 손해로 다가왔다. 굵직한 고객 몇몇은 벌써 다른 사진가를 물색하고 있었다.” 프로 사진가에게 이것만큼 치명적인 읽은 없다. 한마디로 디지털 카메라 한번 섣불리 썼다가 앗, 뜨거라 싶게 당한 거다. 필카의 한판승! 일동 박수! 짝! 짝! 짝!

물론, 이 책이 나온게 2002년이고 그러니 그가 사용했었다는 디지털 카메라의 성능이 요즘 것 보다는 한참이나 성능이 뒤졌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그는 “향상된 성능의 디지털 카메라는 커다란 힘으로 나를 유혹하고 있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으려고 내심 눈치를 살피고 있는 중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로 다음 문장에서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필름 카메라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나의 태도는 단호하다.”고.

그런데 최근에 보니 이 분이 <<윤광준의 아름다운 디카세상 : 디카로 잘 찍은 사진 한 장>>라는 책을 새로 냈다. line extension이다. 전편의 메인타이틀 이었던 ‘잘 찍은 사진 한 장’이라는 제목이 이번에는 부제로 갔다. 앞에다 혹을 하나 달고. 하여 ‘디카로 잘 찍은 한 장’이다.

그가 ‘디카의 유혹’에 넘어갔다기보다는 ‘브랜드 확장의 유혹’에 넘어갔다, 고 얘기하면 지나친 혹평일까? 모르겠다. 서점에 가서 그의 새 책을 슬렁슬렁 넘겨보면서 중간중간에 게재된 사진을 보았다. 실망스러웠다. 디카로 찍은 것이리라. 속편은 사지 않을 것이다. 해서 나는, 아직은 필카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근데 솔직히 필름 현상하고 스캔받고 이러는 거 ‘느무느무’ 귀찮다. 그냥 퀄러티 조금 양보하고 편하게 찍고 싶기도 하다. 그러니 누가 속편에 돌을 던지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