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의 책

1.
어제 누군가 전화 해서 새해 인사를 한다. 고맙다. 그는 가끔 따위넷에 들른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자 따위넷을 통해 새해인사를 해야겠다는 스스로 생각해도 참으로 대견하고 기특한, 그 대견하기가 63빌딩처럼 우뚝하고, 그 기특하기가 남산타워만한 생각이 떠올랐다. 장하다. 아무렴!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는 지겹다. 그렇다고 소시적에 선남선녀에게 즐겨 쓰던 새해 남자 많이 받어!, 새해 여자 많이 받어!, 라는 인사말을 하기에도 이젠 너무 늙어버렸다. 인생 징허다.

하여 여기에 작년의 책을 소개하노니 따위넷에 오는 사람마다 니돈 주고 사서, 하여 쑤비 니겨 바삐 읽어 새해에는 다만 교양을 함양케 할 따라미니라.

2.
작년에는 책을 몇 권 읽지 않았다. 책 읽는 데 써야할 금쪽 같은 시간을, 그리고 돈을! 허튼 짓 하는 데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그 허튼 짓이 뭔지는 역시나 말해 주지 않겠다.

아무튼 작년의 책은 <<유클리드의 창: 기하학 이야기>>이다. 까치 출판사에서 나왔고 12,000원 주고 샀다. 초판은 2002년에 나왔고 2008년에 내가 산 책은 2007년 5쇄이다. 이 책을 나온지 어언 6년이나 지나서야 사게 되다니! 분하고 원통하고 절통하다.

기하학 대운하 지나가시는 길에 피타고라스의 대실수나 데카르트의 군대생활, 수업시간에 잔뜩 쫄은 아인슈타인의 이야기 따위가 샛강에서 흘러드나니, 지식에 곁들여 잡다한 에피소드를 삽질하는 재미가 쏠쏠하도다.

뜻은 잘 모르지만 문장이 인상적이라 여기에 인용하는 것으로 작년의 책 선정사에 갈음하는 바이다. “당신이 직선으로 움직이지 않을 경우, 유클리드 기하학이 구겨진다.”

과학으로 만드는 배

유병용(지음), <<과학으로 만드는 배>>, 지성사, 2005

1.
언젠가 아들 녀석이 쇠는 물보다 무거운데 쇠로 만든 배는 어떻게 물에 뜨느냐는 질문을 해온 적이 있다. 아르키메데스의 원리와 부력을 들먹이며 대충 설명을 해주기는 했으나 말하는 나나 듣는 아이나 잘 모르기는 매일반이었다.

이 책은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인데 ‘쉽게 풀어 쓴 물과 배, 그리고 유체역학 이야기’라는 부제를 보고 냉큼 대출해서 읽었으며, 녀석의 질문에 답해줄 만큼의 지식은 얻었다.

2.
요즘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레오나르도 믈로디노프의 <<유클리드의 창: 기하학 이야기>>, 그밖에 여기에 쓰기에는 내키지 않는 공학책들을 몇 권 들여다 보았거나 보고 있는데 이런 류의 책에는 그 좋아하는 인문학 책에서는 맛볼 수 없는 재미가 있다. 내 어린시절의 꿈이 괜히 과학자였던 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3.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생, 엔지니어로 살았어도 괜찮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덤이다.

p.s.
도킨스의 책에 대해서는 따로 독후감 쓸 일은 없으니 말 나온 김에 몇 마디 해둔다. “비행 스파게티 괴물 복음서”같은 구절이나 “수많은 사람들에게 동시에 알아들을 수 있는 신호를 보내고 그 모든 사람들로부터 동시에 메시지를 수신할 수 있는 신은 절대 단순한 존재일 리가 없다. 그 엄청난 대역폭을 생각해보라!” 따위의 문장들만 눈에 들어 올 뿐, 이렇다할 감흥은 없었다. 나 같으면 “비행 스파게티 괴물” 보다는 ‘날으는 스파게티 괴물’이라고 했을 것이다. 백과사전에서 모르몬교 항목을 찾아 읽었다.

푸르른 틈새

권여선 (지음), <<푸르른 틈새>>, 문학동네, 2007

작가가 이상문학상을 타고 난 뒤에─아마도 이때다 하면서(어디 가겠는가? 나의 시니컬이)─ 재발간 된 소설책, 하여 1년여를 보관함에 담겨 있다가 얼결에 장바구니로 옮겨와 기어코 배달되어 온 책. 읽다 보니, 뭐야 이거 성장소설아냐?, 싶어 그제서야 뒷표지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젊음의 슬픔과 방황, 그 소진과 성숙의 의미를 독특하게 그려낸 아름다운 성장소설”이라고 적혀 있다. 어쨌든 읽을만 했다.

*****
늦잠자고 일어난 휴학생 딸과 “낡은 소파에 누워 있던 아버지”가 “아버지, 라면 끓일까요?”라는 말을 시작으로 낮술 하는 장면만 따로 떼어 단편 영화 하나 찍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슬픈데 코믹한 영화.

“그러엄! 이기 말하자문 전골이라, 전골, 라면전골이라.”
아버지는 꿀꿀이죽처럼 잔뜩 풀어진 라면냄비에 숟가락을 꽂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오오, 라면전골. 그렇군요”
굴과 계란이 든 라면을 먹으며 아버지와 나는 자기 몫의 소주 한 병씩을 마셨다. 아버지와 나는 대화에서도 합의점을 찾을 수 없었다. 라면냄비와 소주병을 나누었듯 아버지와 나는 대화에서도 각자의 몫을 독백했다. 아버지는 당신만의 울분을 큰 소리로 토로했고 나는 나만의 상념을 중얼중얼 주워섬겼다.

“아……. 눈을 뜨자마자 소주를 마셔도 되는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신자유주의

데이비드 하비(지음), 최병두(옮김), <<신자유주의>>, 한울, 2007(초판1쇄), 2008(초판3쇄)

“아빠, 근데, 응, 옵저버가 클로킹을 찾아 내잖아?”
“어려운 말로 디덱트라고 하지. 그런데?”
“근데, 응, 저그족은 오버로드가 그렇고.”
“그런데?”
“응, 그러면 테란족에서는 뭐가 클로킹을 디텍트 해?”
“미사일 터렛!”
“미사일 터렛?”
“응”
“아싸!”

일곱살 아들녀석에게 스타크래프트나 가르치면서, 옛날 말로 음풍농월, 안빈낙도, 가렴주구, 아 이건 아니구나, 독야청청, 팔도유람! 뭐 이런 거나 하면서 살아보려는 내게 세상이 자꾸만 어려운 책을 읽으라고 시킨다.

어쩔 수 없다. 읽어야지. 나와,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저 일곱살 아들녀석이 살아가야 할 세상은, “모든 종류의 공적 사업들(물, 원격통신, 교통), 사회복지 제공(사회주택, 교육, 보건의료, 연금), 공적 기관들(대학, 연구실, 감옥), 그리고 심지어 전쟁(이라크에서 정규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는 민간 용병 ‘군대’에서 예시되는 것처럼)도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물론 그 너머에 있는 곳(예로, 중국)에서도 어느 정도 민영화” 되었거나 될 세상이니까.

“오늘날 수사(만인의 이익)와 실제(소수 지배계급의 이익) 사이 괴리의 확대는 매우 확연하다”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선진화 대 민영화, 4대강 정비사업 대 대운하 따위처럼 “수사와 실제 사이(의) 괴리”를 지켜보는 재미가 씁쓸하겠기 때문이다. 장마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오늘 밤에도 촛불이 바람에 스치운다

세계화?

토머스 슈뢰터(지음), 유동환(옮김), <<세계화?>>, 푸른나무, 2007

오늘의 사태 또한 한 과정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 그 과정은 오래 전에 시작되어 차근차근 진행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막아내기 힘들다는 것, 그러니 당해도 알고나 당하고 되도록이면 천천히 당해야 한다는 것, 저항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것, 그러자면 대가리 속에 뭐라도 자꾸 쑤셔넣어야 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