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오호라, 이 녀석들이 ‘매너 파일런’이라는 역설적 용어와, 사람 성질 건드리는 그 고약한 방법을 어디서 배웠나 했더니 여기서 배웠구나. 만화책이라고 생각하고 안 사주었는데 교과서라고 생각하고 사주어야겠다. 뭘? <<에쒸비>>를! 우리집에 13권까지 있는데 방금 알라딘에서 검색해보니 31권까지 나와 있다. 16권까지 일단 세 권을 장바구니에 담기는 담았다만.

어조사

유치원에 다녀온 아들녀석, 먼저 선, 볼 견, 어조사 지, 밝을 명, 선견지명, 하고 읊더니 그게 무슨 뜻이냔다. 정말 유치원에서 인생에 필요한 모든 걸 다 가르치려나? 망조다. 나라가 대체 어떻게 되려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대충 그 뜻을 풀이해 주고 가만 생각해 보니 어조사 지의 ‘어조사’가 거슬린다. 다른 놈들은 다 ‘제 뜻’을 밝히고 있는데 이 놈 혼자만 무슨 중뿔났다고 ‘제 역할’을 말하고 있다. 그래, 너 잘났다. 그렇게 꼭 텨?야 하냐! 니가 그잘난 어조사인 건 알겠는데 대관절 네놈의 뜻은 뭐냔 말이닷! 나는 애꿎은 어조사 지 자를 나무라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어조사’를 어려워했다. 어조사 지 자 말고 어조사 야 자도 있고 어조사 어 자도 있다. 농자천하지대본야! 청출어람청어람! 생긴 것도 다르고 쓰임새도 다른 데 이걸 다 ‘어조사’라고 읽어야 하다니! 음, 분하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누가 있어, 한자를 읽을 때 보통은 훈을 밝혀 읽지만 어조사는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범주가 다르다. 이걸 염두에 두기 바란다, 고 가르쳐 주었을 것인가. 혹은 들었는데 내가 흘려버렸는 지도 모르겠다. 그땐 내가 너무 어렸으니까.

곧 어조사처럼 정체 모를 봄이 오겠지.

대운하

2월 27일,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책 두 권을 샀다. 다음은 그 가운데 하나에서 발췌한 것이다.

“자, 이제부터 뭔가가 변화한다.” 하고 그는 외쳤다. 그는 이제부터 침대를 ‘그림’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아침에 눈을 뜨자 그는 한참 동안을 그림 속에 누워서 이제 의자를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골똘히 생각하였다. 그는 의자를 자명종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옷을 입고는 자명종에 앉아서 두 팔을 책상에 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책상을 더 이상 책상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었다. 그는 이제 책상을 양탄자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그 남자는 아침에 그림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는 양탄자 옆의 자명종에 앉아 무엇을 어떻게 부를까 곰곰히 생각한 것이다.

─ <<고등학교 문법>>에서 재인용

2월29일, 강남 교보문고에서 책 한 권을 샀다. 다음은 그 책에서 위에 인용된 구절과 동일한 곳이라 짐작되는 부분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이제 달라질 거야.” 이렇게 외치면서 그는 이제부터 침대를 ‘사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피곤하군, 사진 속으로 들어가야겠어.”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는 아침마다 한참씩 사진 속에 누운 채로 이제부터 의자를 뭐라고 부를까를 고심했다. 그러다가 의자를 ‘시계’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러니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시계 위에 앉아 양팔을 책상 위에 괴고 있었다. 그러나 책상은 이제 더 이상 책상이 아니었다. 그는 책상을 ‘양탄자’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남자는 아침에 사진 속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양탄자 위에 놓인 시계 위에 앉아, 무엇을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 지를 고심했다.”

─ 페터 벡셀(지음), 이용숙(옮김), <<책상은 책상이다>>에서

나는 저 고독한 사내가 외로울까 싶어 같이 미쳐주기로 한다. 그러니까 똥을 화물로, 변기를 컨테이너로, 오수관을 운하라고 부르기로 한다. 나는 컨테이너에 화물을 실어 대운하로 흘려보낸다.

저 사내의 말로는 이러하다. “그래서 그는 그때부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침묵했고,/ 자기 자신하고만 이야기했고, 더 이상 인사조차도 하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