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

나는 ‘오늘의 책’, 검문, 막차, 2004년 12월 사망사고 발생장소, 마음의 등 뒤로 굳게 닫힌 셔터.

세상은 TTL

점꾀

부인께옵서 아씨와 도련님들께 <<열두띠>>(초방책방, 2003)라는 책을 읽어주시는데 삼가 옆에서 듣자하니 내 점꾀는 이랬다.

“뱀띠는 공부하기를 좋아합니다. 서두르지 않는 조용한 성격으로 모르는 것을 분명하게 알 때까지 끈기있게 노력합니다. 지식에 대한 사랑은 끝이 없어 혼자만의 세계로 깊이 빠져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꺼려하고 때론 독불장군이 되기도 합니다.”

여기까지 읽더니 한 마디 하신다.

“웬일이니?”

듣고 있던 아씨께서도 한 마디 거드신다.

“딱이다.”

저걸로 그치면 “혼자만의 세계로 깊이 빠져”든 세상의 온갖 “독불장군” 뱀띠들이 불매운동을 벌일까 저어한 나머지 저자는 말미에 이렇게 해결책을 적어 놓았다.

“차분함이 우울하게 가라앉지 않도록 사람들과 사귀면서 꾸준히 공부한다면 세상에 도움을 주는 학문을 이루고 존경받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나는 존경받는 사람이 되기는 다 틀렸다.

다시 쓴 “해프닝”

에궁 내가 뭘 잘못했는지 어제 밤에 쓴 “해프닝”이라는 제목의 포스트가 흔적도 발자국도 소리도 소문도 없이 훌러덩 증발해버려뿌렸다. 제목이 해프닝이라서 그랬다보다. 어떤 불가사의하면서도 미러클하면서도 아리송한 일이 해픈happen해버렸는지 모르겠다. 오늘 밤에도 바람에 해프닝이 스치운다 에궁.

걸식이님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어제의 기억을 오늘에 되살려 다시 썼다.

───── * ───── * ─────

새삼스럽게 말하겠는데, 바다는 넓었다.
바다를 본 감흥 따위는 없었다.
나는 백사장에다가 ‘이나우 바보’라고 적었다가
파도가 와서 그 낙서를 지워버리는 걸 보면서 신나게 놀았다.
(삼순아 어디 있니 돌아와, 라고 쓸 걸 그랬다.)

돌아갈 시간이 되어 텐트를 걷고 있는데
방송 소리가 들렸다.
여섯살 먹은 어린이를 해상안전어쩌구저쩌구 하는 곳에서 보관하고 있으니
칠칠맞은띨띨한 부모는 와서 냉큼 가져가라라는 것이었다.

느낌이 이상했다. 그런데 마침 내 아들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일행에게 어디갔냐고 물었더니 누나 따라서 샤워 하러 갔다고 했다.
그리고는 싸던 짐들을 계속 쌌다.

나는 뭔가 미심쩍어 뭐 조국통일사업 말고는 딱히 할 일도 없는데 확인이나 해보자는 심산으로 터덜터덜 해상안전어쩌구저쩌구 하는 곳을 찾아나섰다.

여긴가, 아니네.
그럼 여긴가, 여기도 아니네.
그럼 저긴가,
하는데 다시 방송이 흘러 나왔다.
오우 마이 갓트, 내 아들이 맞았다. 뭐 됐다.

두 번째 방송이 나오고 10초 후에 나는 해상안전어쩌구저쩌구본부에 도착했다.
오우 마이 갓트, 내 아들이 거기 있었다.

나는 짐짓 천연덕스럽게 찌기, 거기서 뭐해, 가자, 라고 말했고
녀석이 튀어나왔다. 나는 고맙습니다 건성으로 인사를 하고는
울먹이는 녀석의 손을 꼭 잡고 다시 터덜터덜 걸었다. 룰루랄라.

한편, 두 번째 방송을 들은 일행은
난리가 날
뻔하다가
말았다. 귀 밝은 아빠가 이미 데리러 갔으므로
딴에는 해프닝이었다.

문제는 이렇다.
명색이 아빠라는 작자는 자식을 잃어버린 것도 모르고 있다가 사태를 수습해버렸는데
(이것은 일행도 마찬가지다.)
아들녀석만 부모를 잃어버린 경험을 찐하게 한 것이었다.

두고두고 아찔하다.

오래된 창문 열기, 혹은 닫기, 닫아 버리기

결혼 전에 제가 쓰던 방에는 상우네 꺼보다 더 큰 창문이 있었는데요
어머니는 그 창문에서 잘 보이도록 해마다 나팔꽃을 심으셨고요
저는 그 창문 옆에 책상을 놓고 심란한 청춘의 담배만 피워댔드랬죠
어느 해 그 창문 창살에 거미줄이 쳐지고
그 거미줄에 꿀벌이 반쯤 먹힌 채 매달려 있었고요
바람 불고 비가 내리면 그 창문에 대추나무 그림자가 불안스레 흔들렸드랬죠
창문 너머 담장 아래 골목에는 보안등 하나가 전봇대에 매달려 있었고요
자려고 불을 끄면 그 보안등의 불빛이 천장에 또 불안스레 어른거렸드랬죠

그때 이런 걸 썼었드랬죠

“바람이 검은 나뭇잎 사이를 서걱거리며 지나갔다 골목길 보안등의 치마 불빛 속으로 이따금 불나방들이 날아들었다 그들은 눈부신 은빛 날개를 파르르 떨다가 이내 어둠 속으로 투신해갔다 그 풍경위로 빗금을 그으며 비가 내렸다”

에잇, 그만 할래요, 그만 잘래요, 괴로왔던 그 시절이 그리워서 괴로워요.

─ 넌꾸님의 중부지방 새벽에 많은 비에 대한 트랙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