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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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웠던 우리 기쁜 젊은 날들의 가슴팍처럼 부산집의 벽은 온통 낙서로 가득하다. 매일 밤 누군가가 여기에 와서 내벽에 뭔가를 적었다. 누구는 혁명을 썼고 누구는 사랑을 썼고 누구는 만남을 썼고 누구는 절망을 썼다. 누구는 저렇게 커다란 함성을 새겼다.

그러나 오래 전에 우리는 그곳을 떠나왔으며 더 이상 그곳에 속하지 않는다. 그저 어쩌다가 택시를 집어 타고 어쩌면 ‘귀소의 새’처럼 그곳으로 달려갈 뿐이다.

오늘 밤 나를, 어느 결에 저 곳을 떠나와 여태 삶을 헤메고 있는 이 가엾은 영혼을 저 곳으로 견인해 갈 사람, 여기 붙어라.

이제 다 나았어요?

멀쩡한 정신도 아닌 주제에 이번에 기억상실증이란 병까지 얻어놓고도 여태 시 따위나 읽고 있는 몽달씨 꼴이 한심했다.
“이거, 또 시예요?”
“그래, 슬픈 시야. 아주 슬픈……”
몽달씨가 핼쑥한 얼굴을 쳐들며 행복하게 웃었다. 슬픈 시라고 해놓고선 웃다니. 나는 이맛살을 찡그리며 몽달씨 옆에 앉았다. 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다 나았어요?”
“응. 시를 읽으면서 누워있었더니 금방 나았지.”

─ 양귀자, “원미동 시인” 中에서

원고의 무게

의사를 꿈꾸던 러시아의 한 청년은 편지를 쓰면 저울에 무게를 달곤 했다. 그는 우편요금을 넘기지 않기 위해 편지를 쓰면 저울에 얹었고 무게가 넘치면 다시 썼다. 정해진 분량 내에 이야기를 마치기를 반복하며 저울에 원고의 무게를 달던, 아르바이트로 글쓰기를 하던 청년은 훗날 러시아 단편소설을 꽃피운 체호프가 되었다.

─ 곽효환 시, “저울” 中에서, (문예중앙 2003년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