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걸이’에 대하여

사람마다 그 사람만의 걸음걸이가 있다.
누군가의 걸음걸이가 마음에 들지않는다고
그에게 걷지 말라 말할 수는 없다.
그건 그 사람더러 죽으라는 얘기다.
지금까지 나더러 죽으라는 사람이 참 많았다.
오늘도 한명 만났다. 어이없다.
나는 내 걸음걸이가 자랑스럽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부끄럽지도 않다.
그곳이 어디이든 그때가 언제이든
걷는 한 나는 내 걸음걸이로 걷을 수밖에 없다.
그 이외의 방법으로 걷는 방법을 나는 배우지 못했다.
내 다리가 짝다리라 내가 삐딱하게 걷는 데,
내 궁둥이가 오리궁둥이라 내가 기우뚱 걷는 데,
내 다리가 팔자다리라 내가 팔자걸음을 걷는 데,
대체 당신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대체 당신이 왜 내 걸음걸이에 화를 낸단 말인가.
어처구니 없다.

당신,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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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각은 항상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고, 언제나 그 주변에 둥근 모양의 것이 자리하고 있는 데 그것이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한다. 볼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 곧 이번에는 우리 자신이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 눈과 타인의 눈의 존재는 우리 자신이 이 시각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만약 우리가 저곳에 있는 언덕이 보인다고 느꼈다면 그 언덕에서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로 보일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의 상호성은 대화에서의 상호성보다 훨씬 근본적인 현상이다. 대화란 대부분의 경우에 <내가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비유적 또는 언어적으로 표현한 시도이고, 또 <그가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발견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 John Berger,<<Ways of Seeing>>, 동문선 문예신서 12, 2002, 3쇄

졸다가 종점까지 가본지 얼마나 됐는지

종점, 종점! 끝이라는 뜻이지! 눈을 뜨니 종점이군. 하하 “대화”라는 이름의 종점.이라니! 이게 말이 되나? 포에틱, 포에틱, 내 인생에 이런 포에틱이 없군. 대화라니. 그리고 그게 종점이라니! 쩝. 나 대화, 정말 싫은데…독백이면 몰라도. 쩝. 자다가 버스타고 “대화”라는 이름의 종점에 닿았네. 아무도 없는 “대화”라는 이름의 종점이라니! 말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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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 남의 미니홈피 방명록에 쓴 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