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멀었다

내가 밤마다 운동을 하는 공원의 약수터에는
딱 두 부류의 사람이 온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 생각은 안하는 사람이 그들이다.
당연하게도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
더 오래 기다려야 하고
더 짧게 사용해야 하고
남이 틀어놓고 그냥 간 수도꼭지도 잠가야한다.
남이 튕기는 물도 맞아야하고
누군가가 데리고 나온 개가 다리를 혓바닥으로 핥아도 꾹 참아야 한다.
사용중에는 불쑥불쑥 말도 없이 끼어드는 손길들을 참아내야 한다.

비 오듯 땀 흘리고 약수터 갔다가 예의 없는 짓을 두 번씩이나 당하고 나니
갑자기 세상이 절망스러워졌다. 아직 멀었다.
악다구니 쓰지 않으면 물 한 모금 마시기도 힘이 드니……쩝

하여간 여러사람이 사용하는 약수터에서는 뭘해도 욕먹기 십상이다.
내가 뭘하는 동안 다른 사람은 기다려야하기 때문이다.

사랑, 아이스크림처럼 녹다

어떤 기억이 아이스크림처럼 더럽게 녹아내리는 여름날
급브레이크를 밟아도 앞으로 솟구쳐나가는 몸
이 그린 스키드 마크. 오죽하면 아스팔트를 저렇게 할퀴었을까

아랫 것들의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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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층들’은 고위층들끼리 저 테이블 위 높은 곳에서 진한 향의 커피 혹은 생과일 주스를 마시며 재잘재잘 회합을 즐기고 있는 동안에 저 ‘아랫것들’은 또 아랫것들끼리 저 테이블 아래에 모여 숙덕숙덕 발냄새나 교환하고 있던 팔월의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암모니아 냄새 코를 찌르던 날, 그 날

검은 비

나는 비명을 삼키듯 아이가 남긴 음식을 식도 속으로 밀어 넣었다 어두운 골짜기를 따라 길은 흘러가고 그 길을 따라 유령의 집들이 흘러갔다 문득 차를 세우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나는 나를 혐오했다 그날 백미러 뒤에 두고 온 太白에 검은 비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