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에게

넓은 책상을 좁게 쓰는 방법은 책상에 온갖 걸 다 늘어놓고 쓰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쓰고 있다. 그리하여 진부하게도 책상에 송곳 하나 꽂을 자리가 없다.

어찌해야 하는가. 간단하다. 책상 위에 있는 온갖 잡동사니를 싹 다 치우면 된다. 문제는 버릴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아, 있기는 있다. 바나나 껍질.

그러나 어림 한 티스푼 없는 소리다. 바나나 껍질 하나 치운다고 이 넓으나 비좁은, 그러니까 내 고매하고 더티한 인품 같은,  이 내 책상에 삼공 노트 누일 자리가 생기겠는가!

나는 어쩔 수 없는 세마이-호더(semi-hoarder)인 것이다. 책상을 책상으로 쓰지 아니하고 창고로 쓰고 있기 때문에 내가 대문호가 못 된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내 영혼의 책상은 늘 비좁았으며, 그 비좁은 책상에 이것, 저것, 그것이 다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평생을 이거 하다가 저거 하고 저거 하다가 그거 하고 그거 하다가 디스 하고 디스 하다가 댓 하고 댓 하다가 썸싱하고 썸싱하다가 결과적으로 나씽하며 살았다.

사람도 그러해서 평생 노원을 만났다. 발치에 와 발라당 눕고 눕는 고양이 ‘모모’만 남았다. 이제 죽을 때가 다 돼 간다.

부스러기

산책길에는 부스러기가 많다

바퀴 부스러기
햇살 부스러기
까치 부스러기
그림자 부스러기
슬픔 부스러기
비명 부스러기
고양이 부스러기
노인 부스러기
파킨슨 부스러기
바람 부스러기
길 부스러기
외로움 부스러기

나는 이런저런 부스러기를 모아
서사를 읽는다

나는 오래 걷는다

뒷짐지고 걷고 싶은데
뒷짐지고 걷고 싶지 않다

가을 아침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출역한 해가, 이제 막 마을버스에서 내려 미금역 방향으로 걸어가는 육신을 비추고, 그 햇살에 등짝을 처맞은 긴 그림자가 아빠빤스 3장 만원이라고 아무렇게나 씌여 있는 하얀 종이 위를 스치는 3012년 9월 22일 07시 48분, 가을 아침.

겟 아웃

영화 채널에서 조던 필 이라는 감독의 대표작 이라는 걸 연속 방송하고 있다.

외출했다가 돌아와 옷 갈아 입고 청소기 가지러 거실에 나온 아내가 화면을 흘끗 보더니 말한다.

_저거 무서운 거지?

운동 다녀와서 단백질 타 먹고 모종의 예술을 하다가 머리 식히려 거실에 나온 예비군이 대꾸한다.

_무서운 거?

아내가 다시 말한다.

_못 나가는 거 아냐?

그제서야 영화의 제목이 내 의식에 들어온다. 겟 아웃.
맞다. 겟 아웃이 나간다는 뜻이지 하면서. 저 영화가 못 나가는 영화구나 하면서.

대화도 끝나고 영화도 끝나고 다 끝나지만 ‘언어’는 끝나지 않는다. 쓰지 못 하는 나의 언어는.

비탈에 시다

산에는 대부분의 나무가 비탈에 서 있다. 비탈에 서 있는 나무가 평지를 꿈꾸는지는 알 수 없다. 비탈에 서 있는 나무가 비탈 저 아래 나무에 견주어 자신의 처지를 만족스럽게 여기는지도 알 수 없다. 산은 무엇보다도 비탈이고 산에 살고자 하면 비탈에 정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