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아침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출역한 해가, 이제 막 마을버스에서 내려 미금역 방향으로 걸어가는 육신을 비추고, 그 햇살에 등짝을 처맞은 긴 그림자가 아빠빤스 3장 만원이라고 아무렇게나 씌여 있는 하얀 종이 위를 스치는 3012년 9월 22일 07시 48분, 가을 아침.

겟 아웃

영화 채널에서 조던 필 이라는 감독의 대표작 이라는 걸 연속 방송하고 있다.

외출했다가 돌아와 옷 갈아 입고 청소기 가지러 거실에 나온 아내가 화면을 흘끗 보더니 말한다.

_저거 무서운 거지?

운동 다녀와서 단백질 타 먹고 모종의 예술을 하다가 머리 식히려 거실에 나온 예비군이 대꾸한다.

_무서운 거?

아내가 다시 말한다.

_못 나가는 거 아냐?

그제서야 영화의 제목이 내 의식에 들어온다. 겟 아웃.
맞다. 겟 아웃이 나간다는 뜻이지 하면서. 저 영화가 못 나가는 영화구나 하면서.

대화도 끝나고 영화도 끝나고 다 끝나지만 ‘언어’는 끝나지 않는다. 쓰지 못 하는 나의 언어는.

비탈에 시다

산에는 대부분의 나무가 비탈에 서 있다. 비탈에 서 있는 나무가 평지를 꿈꾸는지는 알 수 없다. 비탈에 서 있는 나무가 비탈 저 아래 나무에 견주어 자신의 처지를 만족스럽게 여기는지도 알 수 없다. 산은 무엇보다도 비탈이고 산에 살고자 하면 비탈에 정착해야 한다.

고혈압 바위

안녕하세요. 나는 고혈압 바위덩어리입니다. 미동도 없이 붕어처럼 퍼덕거리며 이 슬픔의 궤도를 묵묵히 지나가는 중이죠. 이 환란의 삶에서 그래도 근근이 몇 문장만 더 쓰고, 다만 안녕히 계세요, 하고 작별인사를 하겠습니다. 이것은 첫문장입니다. 어쩌면 마지막 문장일 수도 있습니다.

고양이 나쁜 놈

손님 맞이용으로 올려놓은 꽃병의 꽃을 고양이가 먹는다.

야, 너 뭐해. 내려 와. 안 내려 와.

화들짝 제지하는 아내이다.

나는 세상의 간난에 시달리고 나부끼다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고 있다. 집에 오니 슬픈 소식이 당도해 있다. 시속 30km/h 구간에서 42km/h로 달렸다고 과태료 통지서가 당도해 있다.

야, 너 삐졌어?

고양이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아내가 고양이를 달래는 소리가 들린다.

삐지고 달램 받는 것은 본 따위님이나 하는 거인데,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살다살다 이제는 고양이하고 애정을 다투게 생겼다. 어서 삐져야 하는데 당장은 삐질 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