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아

서울 모처에서 거사를 도모하다가 산 넘고 물 건너 새벽 두 시에 기어들어 왔더니 아내가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물었다.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나는 천상 풍운아답게 답하였다. 영혼 없는 내 대답에 아내는 뭐가 웃긴지 킬킬킬 웃었다.

뭐가 웃기냐고 했더니 내 대답이 웃기다고 그랬다. 아니, 세상에 웃길 게 없어서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라는 말이 웃기단 말인가, 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부엌으로 가 물을 마셨다.

웃기기는 어느 도서관에서 본 “담배는 재떨이에서 피우세요” 같은 문장이 웃긴 거지. 치솔에서 이를 닦읍시다, 라든가 피임은 콘돔에서 하세요, 라든가 강도는 은행에서 하세요, 라든가 커피는 자판기에서 마시세요, 라든가.

새 새

‘새’ 자 들어가는 건 다 개좋다.
새누리당도 개좋고 새정치민주연합도 개좋다.
고백하거니와 새마을운동도 개좋았다.
더 새마을 무브먼트 비갠 인 나인티세브니원, 이라는 문장을 영어 선생한테 두들겨 맞아가며 배웠다.
이, 나라가 아닌 나라는 곧 새나라가 될 것이고
이, 국민이 아닌 국민은 곧 새국민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새 봄의 새 하늘을 날아다니는 한 마리 새 새

07-060

어쩌다가 “환경정비용마대”가 된 전직 플래카드가 한때 자신이 세상에 대고 발음했던 자모음들을 50리터 들이 내면에 구겨넣은 채 가엾은 짐승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는 07-060 버스 정류장

“저기 바깥에 있는 사태들”과 텍스트

즉 하나의 과학적 텍스트는, 특히 그것이 어떤 “저 바깥에 있는 것” 예를 들면 “원자”를 의미하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바흐의 푸가나 몬드리안의 그림들과 구분되고 있다. 그것은 “진리적”이고자 한다. 즉, 저기 바깥에 있는 사태들과 정합적이고자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어쩌면 어떤 놀라운 미학적.인식론적 문제가 제기 된다 : 도대체 텍스트 속에 있는 그 무엇이 저기 바깥에 놓여 있는 사태와 정합적인가? —p. 54

즉 신문의 내용 중 한 부분은 도서관으로 향하고, 나머지의 대부분들은 쓰레기통으로 던져진다. 따라서 완전히 다른 유형의, 신문에 글쓰는 사람이 존재하게 된다. 신문에 글쓰는 사람들 중 한 부류는 도서관들을 위해 쓰고, 다른 부류는 쓰레기통을 위해 쓰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준에 따라 신문은 두 부류로 나눠질 수 있다. 즉 대체적으로 도서관에 적합한 신문과 그 대부분이 휴지통에 적합한 신문. —p. 207

—빌렘 플루서(지음), 윤종석(옮김),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 :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 문에출판사, 2002(1판 3쇄), p.54

그렇게 우정은 추문이 된다

친구는 관계의 이름이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그렇게 우정은 추문이 된다, 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물과 술과 안주와 위산과 위장과 식도를 치욕처럼 토하고 돌아와 책상 앞에 앉은 봄밤, 책상벽에 붙여둔 포스트잇이 떨어져 한 장 낙엽으로 방바닥에 뒹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