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

우: 아빠, 나 따위넷 좀 봐도 돼?
따위: ?
우: !
따위: 봐라. 음, 그게 따위넷은 원칙적으로 만인에게 공개 돼 있는 거고 너도 만인 가운데 1인이니 봐도 된다.

2003년 12월에 따위넷을 열었는데 이런 날이 왔다. 내 자식이 따위넷을 읽는다? 이건 좀 깊이 생각해 볼 문제다.

이글루

목요일. 지겹지도 않은가, 악동들의 로망, 악동들의 교과서, <나홀로 집에 3>를 또, 또, 또, 또 빌려다 본 애셋, 영화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이번에는 그림 그리기에 나섰다. 영화에서처럼 각종 장치가 곳곳에 잡복해 있는 집을 그린다. 문을 딱 열면 뭔가 튀어나와 악당을 골탕먹인다거나 하는 그런 신나는 장치 말이다. “야, 좀 자세하게 그려.” “됐다.” 온갖 추임새를 넣어가며 애셋, 그림을 그리고 있다.

금요일. 그러다가 이건 아니다 싶었던 모양이다. 누나, 우리 밖에 나가서 놀자. 밖에 나가서 이글루 짓자. 그래, 그러자. 그거 좋겠다. 아침나절에 우르르 몰려나간 아이들, 다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다. 가끔씩 막내가 춥다고 드나들며 바깥 소식을 전한다. 아빠, 이따만하게 이글루를 지었어.

토요일. 짓던 건 마저 지어야지. 애셋, 또 나간다. 아주 바람직하다. 아침에 나가서 해질녘까지 밖에서 놀다가 오는 아이들이 요즘 세상에 어디 있단 말가. 아이 엠 존나리 프라우드 오브 유! 막내가 춥다고 들어왔길래 군만두 궈 먹이고 바깥 소식이 궁금해 슬슬 나가 사진을 몇 장 찍고 들어왔다. 야, 그게 이글루면 파리도 전투기다,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토요일 저녁. 밥 먹으러 잠깐 들어왔던 아이들, 먹는둥 마는둥하고 또 기어나간다. 한데 귀신이 씌운 모양이다. 나가면서 아빠도 나와서 도와 달란다. 내가 미쳤냐? 적잖이 실망하더니 현관문을 닫으며 엄마, 나와서 보기라도 해, 라고 말한다. 짠하다. 하여 귀찮아 하시는 아내님 꼬득여 나간다. 나가 본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이 엄동설한에 이글루 지어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얼굴 빨개진 채로 이러고들 있는가, 싶다.

토요일 밤. 집에 돌아와서도 아이들은 연신 베란다 밖 공원의 이글루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아이들이 갑자기 소란스러워 내다보니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이글루를 둘러싸고 있다. “다행이다.” “부수는 것 같지는 않아.” “엄마, 엄마, 갔어.” 한 마디씩만 해도 세 마디가 된다. 한 30분이나 지났을까, 기어코 어떤 아이들이 내 자식들이 이틀에 걸쳐 지어놓은 이글루를 부순 모양이다. “야, 그 무섭다는 중딩들인 모양이다.” 아내도 한 마디 한다. 나는 어린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까 싶어 누운 아이들 곁으로 간다. (아, 요새는 또 비상시국이라 나는 혼자 자고 아내가 안방에서 자기 새끼들 다 데리고 잔다.) 아이들, 의외로 담담하다.

일요일 아침. 나는 지금 베란다 밖 공원의 망가진 이글루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아, 근데 그 형아들 왜 뿌셨지, 그걸.” “야, 너 그 소리 좀 그만해라. 어제부터 다섯 번째야.” 아이들은 여전히 이글루를 짓고 있다.

환청

아버지, 마당 쓰시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린다. 어머니와 두런두런 말씀 나누는 소리도. 나는 지금 20대로 ‘타임 리프’ 하여 상도동집 추운 방에 누워 있다. 늙었는가. 이제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 나게 된다. 자식 새끼는 어디서 술 처먹고 새벽에 기어들어와 죽었는지 살았는지 잠들어 있는데 아버지는 일어나 마당을 쓸었을 것이다. 비명인가. 바람인가.

스도쿠

매트릭스에는 아홉 개의 방이 있고, 각 방에는 다시 아홉 개의 칸이 있다. 이 아홉 개의 칸에 1부터 9까지의 숫자를 하나씩 수납하면 된다. 간단하다. 그러나 이게 규칙의 전부였다면 세상사 얼마나 수월했겠는가. 비가 내리고 어머니가 시집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냥, 화사한 봄날 초속 10센티미터로 낙하하면서 아주 그냥…

아, 나는 군대 가서 지겹게 들었다. 일개 이병으로, 일병으로, 상병으로─더 없다. 어느 날 아침 밥상에 밥과 김치와 계란 후라이만 올렸더니, 우리 딸이 묻더라. 더 없느냐구. 그날은 군말 없이 고추장 삼겹살 볶음을 더 대령했다만 오늘은 더 없다. 진짜 없다. 내 인생에 병장은 없다─줄 서서 대가리 박을 때, 줄 서서 오리 걸음 걸을 때 나는 지겹게 들었다. 오와 열을 맞추라는 소리를! 내가 속한 오와 내가 속한 열에 나와 같은 놈은 없어야 한다. 이것이 게임의 두 번째 규칙이다.

그리하여 문제의 게임, 스도쿠를 해보면 안다.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오과 열을 살피며 매트릭스 전체를 살펴야 한다는 것을. 괄호 열고, 참고로 매트릭스는 유명한 영화의 제목이기 이전에 ‘행렬’이라는 뜻이다. 다시 괄호 열고, 나는 왜 앞 문장을 대가리 속에 곱게 처박아 두지 못하고 굳이 괄호쳐서 여기에 쑤셔넣는가? 괄호 닫고, 또 괄호 닫고.

이 게임만 풀고 자자, 이 게임만 풀고 자자, 흐리고, 시리고, 졸린 눈을 벅벅 문대가며, 남들은 엎드려 시를 쓸 시간에, 나는 엎드려 아이폰 게임이나 하다가 느지막히 일어 났더니, 타임라인에는 소말리아 인질 구축의 영광을 그분께서 낼름 전유하셨다는 소식뿐. 매트릭스에는 오와 열이 보이지 않는다.

오늘의 문장

“<라쇼몽>의 주제는 스스로에게조차 솔직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집약된다. 심지어 죽은 자조차도 자신의 모습을 미화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