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삭기

날이 건조하다. 어느 날 아침에는 아내가 난방을 끄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방은 이산화탄소 농도가 너무 높아.” 그래서 그런가? 자고 나면 콧구멍 내벽에 딱쟁이*가 달라붙는다. 남몰래 새끼손가락을 넣어 후벼 떼어낸다. 드럽다. 전국의 굴삭기**가 씨가 말랐다지만 어딘가에 한 대 쯤은 남았으리라. 누가 한 대 보내주기 바란다. 내 콧구멍 준설 좀 하자.

* ‘딱지’의 잘못

p.s.
** ‘굴착기’의 잘못

폐인의 표지

어제는 이미지가 아니라 실제로 폐인이 되어버린 사람을 만났다. 그는 소주를 박스 채 차에 싣고 다니며 마셔 댄다고 했다. 그와 절연했다는 한 사람은 자신이 몰던 차에서 그가 문을 열고 뛰어내리려 한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그래서일까? 첫 눈에 어떤 범상치 않은 기운이 그의 몸 여기저기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표지는 철거되는 건물에 삐죽삐죽 솟은 철근 같은 거니까 금방 눈에 띈다. 어쩌면 그의 몸속에 축적된 알콜이 휘발하면서 아지랑이 같은 게 피어오르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다음에 나를 만나면 혹시 내 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게 피어오르지는 않는지 잘 관찰해 주기 바란다. 그때까지 많이 마셔 둬야겠다. 오늘 밤에도 닭발에 소주가 스치운다.

치명적 커피

고향별 떠나온지 오래구나. 몇 억 광년이나 더 기다려야 내 그리운 별에 돌아갈 수 있나. 이런 쓸데 없는 공상하면서 모닝 커피 한 잔 마시고 있는데 노트북이 입맛을 다시길래 조금 줬더니 하 이 자식이 정신줄을 놓아버렸네. 커피가 네게 그리 치명적인 약물이었니?

희망

눈이 왔다 죽었다 살아 났다

살어리 죽으리랏다 불곡산에

살어리 죽으리랏다

눈은 오고 아내는 나가고

아이들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오후

모탈들아 눈 온다

희망

날이 흐리고
따위가 눕는다.

바람보다 후딱 누워
바람이 다 지나가도 자빠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