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우체국 앞에서

#1 간이 우체국

막이 오르면 소포 꾸러미를 안고 무대 좌측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따위.

따위: (좌우를 두리번 거리다가 창구 앞에 가서 저울에 소포를 얹어 놓으며)저, 이거 대구 갈 건데 내일까지 들어가나요?

직원1: 네. 주소 적으셨죠?

따위: 네.

직원1: (윗면의 주소가 보이도록 소포꾸러미를 자기 쪽으로 돌려 놓으며) 내용물이 뭐예요?

따위: (잠시 멈칫하다가) 저, 폭발물 같은 거 보내면 혼나나요?

직원1: (키보드를 두두리다가)네?

직원2: (놀라서 쳐다보면)

따위: 그럼 그냥 영양제라고 해주세요.

직원1: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며) 내용물이 정확히 뭐죠?

직원2: 내용물이 뭐냐고 물어보니까 농담하시는 거 같은데…

따위: 영양제 맞아요. 미심쩍으면 뜯어보세요.

직원1: 4천 500원입니다.

따위: (혼자 중얼거리는) 만원 받았는데 4천 500원 빼면 5천 500원 남는 장사네. 호떡 사먹어야 겠다.

직원1: (영수증과 잔돈을 건네면)

따위: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직원1: 네, 안녕히 가세요.

따위, 들어온 문으로 퇴장하면,

직원1: (옆을 돌아보며)저 사람 뭐야?

직원2: 놔둬. 인생이 심심한가 보지.

직원1: (뭐 저따위 인간이 다 있어, 하는 표정으로)머리는 덥수룩해 가지고서는… 어째 홀아비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아?

직원2: 글쎄.




#2. 호떡집에 불난 호떡집 앞

따위: 호떡 주세요.

호떡: 몇 개나?

따위: 한 개 얼만데요?

호떡 : 500원이요.

따위: 열한 개 5천원!

호떡: 안 돼요. 호떡 팔아 얼마나 남는다구.

따위: 그럼 한 개만 주세요.

호떡: (뭐, 이따위 새끼가 다 있어 하는 표정으로)알았수.


#3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든 거리

호떡을 먹으며 걸어가는 따위의 쓸쓸한 것 같으면서도 화려한 것 같으면서도 멍청한 뒷 모습.

암전.
(끝)

관객들, 뭐 이따위 연극이 하는 표정으로 웅성거리고.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객석에 남아 조명이 꺼진 무대를” 보고 있는 고독한 연출가.

다음날 조간 신문에 실린 연극평 헤드라인; “21세기형 신 부조리극 탄생, 장기 흥행 예고”

절판의, 잊혀진 계절

술 마시고
당구 치고
노래방 갔다
그집에 갔다
왔다

주인은
대학로에게
저 아끼던, 아끼는, 두고두고 아까울
사진집을 덜컥 주었다

주인은
나에게
그러니까 남주어도 아깝지 않을 무슨 책 한 권과
몽골제 보드카 한 병을 주었다

나는 답례로
신던 양말을 벗어 놓고
왔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러니까 연애와 자우림과 한성별곡과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와
그밖에 오디오와
그밖에 연애와
그밖에 연애 얘기를 하다가

대학로는 먼저 가고
주인은 잠들고
나는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 소리를
홀로 듣는 객 모양
모든 소리를 30년 전 소리로 돌려 놓는
영묘한 재주가 있는
오디오 소리를 푸지게 듣다가
왔다

책은 두고
술병만 챙겨
왔다

다 좋은데
양말을 벗어 놓고
왔다

다음 날
죽었다
살아
났다

절판의 계절

실신할 것 같은 마음으로
따위의 숲에 나앉았는데
뭔가
머리를

친다

기분 나빠 쳐다보니 낙엽이다

그만 하면 됐다고
그만하라고
그만 하고 정신 차리라고

그만 정신 차리고 다시
쓰라고 그리고
살아가라고
삐뚤빼뚤 가더라도 (      )의 길을 가라고, 가을이
정보과 형사를 보내

한 대

쳐준 것일까

낙엽에 한 대 맞았을 뿐인데
그게 꼭 둔기로 맞은 것처럼
아프다

왜 내 이별은 비데로 뒷마무리한 것처럼 개운하지 않은가
왜 내 문장에는 채워넣어야 할 괄호가 남아 있나

절판의 계절

유명하다는 카페 골목에서
진짜 오리지날 순 숫 노총각과 차를 마신다
그는 베트남 가서 색시감을 데려오면 어떻겠냐는 이웃의 조심스런 권유를 받은 적도 있다
아내는 내가 이 골목에 오는 걸 극구 반대했다
아마도 물가에 어린아이를 내놓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유명하다는 카페 골목에 앉았는데도
낭만은 어디 망명갔는지 콧배기도 안 보이고
7천원이면 라면이 몇 갠데…
나는 얼그레이 한 잔 값이 아까운 것이다
자고 갈 거죠?
생긴 거는 안 그런데 무지하게 예민한 이 총각
오늘은 웬일로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인다
밤길은 멀고 들어 자나 한데 자나 뒤척이기는 마찬가지일테니까
비문이라도 쓰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니까
총각의 늙은 개는 저 혼자 밤을 짖어야 할 것이다
나는 본연의 싸가지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아무도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기로 한다
그나저나 아들친구들에게 잘 해 줘야 겠다
나 죽으면 운구해 줄지도 모르는 놈들이니까

로스트 겁 헤드*

주)*로스트 겁 헤드는 겁이 없다는 뜻을 가진, 저 한 시대를 풍미 했던 비속어를 완곡하게 표현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