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마지막 초읽기

빈문서 1쪽, 1줄, 1칸에서 1초 간격으로 명멸하는 커서―

마지막 30초, 하나, 둘, 셋, 넷,

늦어도 아홉에는 착점을 해야 하는데―

다섯, 여섯,

봄날은 가는데―

일곱, 여덟, 아…

나는 꽃에게도 원한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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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30초,

자연얼굴 확인증

자연머리 확인증을 읽고 그럼 나처럼 잘 생긴 사람은 자연얼굴 확인증을 들고 다녀야 하나,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경고: 자연얼굴 확인증이 아니라 자연코 확인증이겠지, 라는 식의 악플 달면 3일간 절교함.)

기억은 사라지고 메모는 메모를 했었다는 기억과 함께 잊혀진다

흘러 간 노트에 메모되어 있는 구절들을 여기에 옮겨 둔다. 부질 없다.

“아버지는 내게 언제나 물질적 손실을 지나치게 비극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그래서 소나 말 또는 노예가 죽는다고 해서 나는 그걸 큰 비극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p110

“물론 불평등했지만 아무튼 노예와 주인의 관계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였다. 따라서 주인은 자기 노예를 ‘사랑했다’. 자기 개를 사랑하지 않은 주인이 어디 있겠는가?” p111

─ 조르주 뒤비, <<사생활의 역사 1>

“가령 우리나라에서는 기혼 여성을 두고 ‘집사람’이니 ‘안식구’니 ‘內子’니 심지어는 ‘부억데기’니 하는 환유가 자주 쓰인다.” p17

─ 한국기호학회(엮음) <<은유화 환유>>

“인간은 짐승과 다르다. 따라서 내일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할 지라도 얼굴을 씻고 이를 닦는다. 자신에게 규율과 질서를 부과하고 자기 생활의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p155

─ 서경식,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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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이나 한미 FTA 때문에 헤어지는 연인은 드물다.” 하재영 作 <고도리>, 창비, 2007 가을

덤덤이가 하늘나라로 떠났다.

식탁에서 아이들에게 학교생활을 물어 보는 목소리에서 쓸쓸함이 조금 배어 나왔을 뿐 김포 어딘가에 가서 고양이를 화장하고 온 아내는 생각보다 담담해 했다. 막내는 컴퓨터 앞에 매달려 있고 위로 두 아이는 태권도장에 간 시간, 아내는 저 혼자 어둠 속에 누워 슬픔을 삭이고 있다. 마음이 영 싱숭생숭하여 컴퓨터 앞에서 한참 딴짓하가다 위로해 준답시고 가서 슬그머니 들러 붙었다.

왜 또 들러 붙어?
내 맘은 좋은 줄 알어.
그러게 있을 때 잘해주지, 고양이 오줌 쌌다고 있는 대로 신경질이나 내고, 오줌도 자기가 치웠나 뭐. 내가 다 치웠지.

결국 본전도 못 건졌다.
태권도장에 다녀온 엽이가 물었다.
엄마, 엘리 언제 와?
병원에 오래 있어야 된대. 아내가 말했다.

“차, 찌그러진 곳 복구”

저 실례합니다만 마음 찌그러진 곳도 복구할 수 있나요? 보시다시피 지금 제 마음이 많이 찌그러져 있어서 그래요 농담 아니예요 저 지금 아주 심각해요 이 아저씨 장사 한두 번 하시나 왜 그러긴 왜 그래요? 끼워주기 싫다는데 자꾸 끼어들길래 그냥 확 들이 받아버린 적도 여러 번이구요 제쪽에서 무리하게 끼어들다가 받힌 적도 여러 번이구요 그쵸 그쵸 역시 전문가는 다르시네 성한 데가 어디 한 군데도 없죠 내 맘이 내 맘이 아니라니깐요 진작 그러실 일이지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 것 같네요 제가 수고비는 섭섭하지 않게 쳐드리죠 좋아요 아 그리고 이왕이면 자잘한 기스도 없애으면 좋겠는데……이 기스는 얼마 전 술자리에서 난 거구요 이 기스는 늙어가는 누이 얼굴 보고 생긴 거구요 또 이 기스는 자식놈 때문에 생긴거구요 또 이 기스는……에잇, 그만합시다 갑자기 청승맞아지네 아무튼 잘 좀 펴주세요 특히 여기를 신경써 주세요 요기 요기가 바로 제 트라우마거든요 사연은 무슨? 그만한 사연 없는 마음이 어디 있겠어요 광택이요? 광택까지는 필요없어요 이 똥찰 타면 얼마나 탄다구 뭐 폐차할 생각을 전혀 안 해본 건 아닌데요 그래도 내 마음인데 어쩌겠어요 이제라도 아껴가며 타야죠

2008년 3월 2일 일요일, 한남대교 남단 고속터미널 방향, 봄 온다고 남들은 꽃도 피우는데 나는 마음이나 좀 펴볼까 했더니만 뒷차들이 신호 바뀌었다고 하두 빵빵거리길래 그냥 왔다. 성질머리들 하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