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딴소리하면 웃긴다

다음은 어는 소설에서 발췌한 구절이다.

어부는 선착장에서 늙은 구장을 만났다.
인자 나가는가?
예, 인자 나가요. 밥은 자셨소?
구장은 그의 아버지의 친구로 친구들이 모두 죽고 홀로 남은 이가 흔히 그렇듯 훨씬 더 늙어 버린 관계로 잠시 정신이 오락가락했기에 그는 목소리를 잔뜩 높였다.
요즘 갈치가 무는가, 돔이 무는가?
암것도 안 무요.
이, 그라믄 나도 한 마리 좀 낚어다 주소.
어르신, 바다에서 고기가 한 마리도 안 문단께라.
죽어야 쓰는디.
정신의 오락가락은 말의 오락가락으로 바뀌기 쉬웠다.
무슨 말씀이요. 오래 사시야지.
죽는 것이 좋아. 죽어 삐린 것이 좋당께.
죽는 것이 뭐가 좋습니께. 이승 강아지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고 안 그랍디여.
다들 죽어 삐리잖어. 죽어 뿔고 나서 죽어 간 디가 고약타고 돌아온 사람이 있능가?
그는 낚시 채비들 내려놓고 늙은이를 내려다봤다. 눈물과 눈곱이 항시 머물러 있는 그곳에는 그러나 보기에 무슨 기운이 지나가는 듯도 했다. 이제 죽어야 할 때를 알아차린 듯도 했고 어쩌면 산 귀신이 되어 가는 듯도 했다.
이? 봤냐고. 거그가 싫다고 온 사람을.
그 말도 맞소.
어부는 대답을 작게 했다.
어부는 그쯤에서 대꾸를 멈추고 배의 밧줄을 끌어당겼다. 늙은이 만큼이나 늙은 배가 느릿느릿 다가왔고 그는 잠시 배의 움직임이 구장의 걸음걸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배 갑판이 간밤의 이슬로 촉촉해서 늙은이의 입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린 침을 꼭닮아 있었다.
그렇다믄 어이, 나 참짱애(장어)나 한 마리 낚어다 주소이? 그놈 이나 한 마리 과서 묵으면 좀 살 것 같네 이.
늙은이는 아주 짧은 순간에 죽을 것에서 살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놈을 들지름 쪼깜 놓고 뽁아 갖고는.
늙은이의 말은 거기서 멈췄다. 입을 다문 게 아니라 기계소리에 묻힌 것이다. 어부가 그의 오래되고 작은 배의 기계를 돌리고 나서도 늙은이의 말은 뭐라고 구시렁구시렁 계속되었던 것이다. 늙는다는 것은 어쨌거나 젊은 것들이 짐작하기 어려운, 죽음이나 또 다른 삶에 대한 쪼가리 같은 샛길을 발견해 가는 중이라 할 만한데 그래서 그들은 수시로 이곳을 떠나 저곳으로 잠시 다녀오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여전히 늙은이는 서서히 꽁무니를 빼는 배를 바라보며 뭐라고 궁시렁대는 중이었다.*

정치인들이 가끔 웃기는 건 딴소리를 잘 하기 때문이다. 딴소리를 잘 하려면 일관성이 없어야 하고 조금전에 했던 말을 붕어처럼 잊어버리면 된다.

*출처: 2000년도 24회 이상문학상작품집 <돗낚는 어부> 중에서, 한창훈 281~282쪽, 문학사상사

14. 패러디하면 웃긴다

문학용어 사전에 보면 패러디는 ‘한 작가의 말, 문체, 태도, 억양과 생각 등을 우스꽝스럽게 만들 목적으로 모방해서 사용하는 것’이라고 나와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50페이지 셋째줄) 뭐든지 제대로 하려면 쉽지 않은 법. 패러디는 ‘원본과의 유사성’과 ‘원본의 의도적인 왜곡’ 사이에서 섬세한 균형감각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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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광고를 패러디한 음료광고*

웃음을 목적으로 한 패러디의 첫번째 원칙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을 패러디하라는 것이다. 내가 패러디를 하는데 상대방이 그게 무엇을 패러디 한 것인지 모르다면 많은 경우 웃기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듣기는 커녕 성격파탄자 소리 듣기 딱 좋다. 바로 이 때문에 영화, 광고, 드라마, 개그 등이 자주 패러디 되는 것이다. 좀 유식하게 말하자면 요즘 시대에는 “패러디하는 것도 패러디 이고 패러디 되는 것도 패러디이다.”라고 쟝 보드리야르가 말했다.(이것도 세종실록지리지 50페이지 셋째줄)

그러니 웃기고 싶다면 광고도 열심히 보아라. 책을 많이 읽어라. 모든 분야의 모든 책을 읽어라. 영화를 많이 보아라. 모든 분야의 모든 영화를 보아라. 아주 텔레비전 앞에서 살아라. 인터넷도 열심히 들여다 보아야 한다. 일할 시간 없다. 공부할 시간 없다. 아, 웃기자는 데 그딴 거 할 시간이 어디 있는가.

내 말 안듣고 일할 거 다하고 공부할 거 다하면서 원본으로서의 가치가 무궁무진한 영화, 광고, 드라마, 개그 등등 이런 거 안 보고 안 읽으면 패러디는 고사하고 남들이 패러디 하는 걸 보고 웃지도 못한다. 원본을 모르니 도대체 그게 왜 웃기는지 알 수가 없는 거다. 남을 웃기는 거, 이거 거저 되는 거 아니다. 노력해야 한다. 아무튼 패러디는 ‘원본’을 아는 게 재산이다. 원본!

패러디의 두번째 원칙은 ‘삐닥이 정신을 가지라는 것’이다. ‘원본’을 삐딱하게 바라보고 우습게 재해석할 수 있는 능력. 이걸 키워야 하는 거다. 이거 키우자면 영화보고, TV보고 하면서 놀러다닐 시간 없다. 그딴 거 다하면 국어사전은 언제 한번 들쳐보고, 고전은 언제 읽는단 말인가. 공부, 이거 정말 열심히 해야 한다.

footnote:
*이 따위넷에 툭하면 얼쩡거리시는 걸식이님이 이 광고의 카피를 썼다. 모르긴 몰라도 이게 걸식이님 인생의 거의 유일한 자랑이 아닐까 싶다.

13. 바꾸면 웃긴다

영어에 두음전환(頭音轉換 spoonerism)이라는 용어가 있다. 영국의 권위 있는 귀족 순수한 혈통 루이 윌리엄스 세바스챤 주니어 3세의 친구인 윌리엄 A. 스푸너(1844~1930)라는 사람의 이름을 딴 용어라고 한다. 이거 별거 아니다. 이런 거다. 즉 사회적 지위를 의미하는 social position을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pocial sosition으로 바꾸어 발음하는 것이다. 두 단어의 초성인 s와 p가 서로 자리를 바꿔 앉았다. 그 밖에도 이런 예들이 있다.

“a well-boiled icicle” for “a well-oiled bicycle”
“a queer old dean” for “a deer old queen”
a crushing blow를 a blushing crow라고 하는 경우 등

한국어는 표기체계자체가 음절 중심이라, 위의 예에서처럼 순수하게 ‘초성’만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다만 ‘초성 + 중성 (+ 종성)’을 포함한 한 음절 전부의 순서를 바꾸면 이와 위의 예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기는 한다. 이걸 넓은 의미의 스푸너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래서 <남아일언은 중천금이요 일구이언은 이부자지라>와 <간음빙자혼인죄>같은 말장난이 생겨난다. 오호, 그리고 보라. 이 순 건달! 혹은 진짜 양아치! 혹은 이 썰렁한 작업남! 아무튼 웃기는 짬뽕 같은 오 이 남자!

__오, 아가씨. 커피 있으면 시간 한 잔 할까?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무실의 부속 화장실의 변기 앞 벽에는 이런 구절이 붙어 있다. 조금 전에 보고 왔다.

__휴지는 변기 속으로!

내가 뭐하고 왔느냐 하면 <변기는 휴지 속으로!> 하고 왔다. 조심하라. 이거 버릇되면 썰렁해진다. 약도 없다.

아이들 동화책 중에 <시내로 간 꼬마곰>이라는 게 있다. 제목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어느 미련 곰탱이같은 꼬마곰이 시내 나갔다가 있는 고생 없는 고생 죽을 고생 살 고생 헛고생 생고생만 죽도록 하고 집에 돌아온다는 눈물과 한숨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감동적인 줄거리의 책이다. 이걸 나는 꼭 <꼬마로 간 시내곰>이라고 읽는다. 조심하라. 이거 버릇되면 썰렁해진다. 약도 없다.

***

뭐 이런 말이 있다. 우리는 아무생각 없이 돌을 던지지만 개구리는 그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말. 우리 심심한데 이걸 한번 바꾸어 보자. 개구리를 함부로 던지지 마라. 길가의 돌이 맞을 수도 있다. 맞는 돌 기분 나쁘다. 이거 넌센스다. 좀 웃기지 않는가?

나는 공공장소에서 마이크를 설치하고 테스트 하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아아, 마이크 시험중, 아아, 마이크 너는 지금 테스트 당하고 있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대략 웃겼다.

바꾸라. 위치를 바꾸고 순서를 바꾸고 역할을 바꾸고 입장을 바꾸고 또 바꾸라.
바꾸라. 그리하면 웃길 것이다.

12. 문법을 파괴하면 웃긴다

우리는 가끔 니가 먼저 내 옆구리 찔렀지 내가 먼저 니 옆구리 찔렀냐, 하면서 쓸데 없이 싸운다. 그러나 누가 먼저 옆구리를 찔렀는지는 지금 내 관심 밖이다. 내 관심은 무엇으로 옆구리를 찔렀을까, 이다. 난 이게 정말로 궁금하다.

수건? 전화기? 풍선? 의자? 선풍기? 자동차? 쓰레기통? 코딱지? 책?

이게 어색한 이유는 ‘찌르다’라는 동사에 내장되어 있는 문법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니가 먼저 수건으로 내 옆구리 찔렀지 내가 먼저 수건으로 니 옆구리 찔렀냐?

이게 대체 말이 되느냔 말이다.

자,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찌르다’라는 동사이다. ‘찌르다’라는 동사는 늘‘뾰족한 물체’를 데리고 다닌다. 말하자면 ‘뾰족한 물체’는 ‘찌르다’라는 동사의 배우자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천년만년 더불어 살아가 한 무덤 밑에서 또 영원히 지지고 볶는 배우자. ‘찌르다’와 ‘뾰족한 물체’는 우리 머리 속에서 아구찜과 꽃게찜처럼, 꽃게찜과 꽃게탕처럼, 해장국과 감자탕처럼, 라면과 공기밥처럼 붙어 다닌다.

문법은 주어가 단수일 때는 단수동사를, 복수 일 때는 복수 동사를 써야 한다는 것만이 분법이 아니다. 이렇듯 ‘찌르다’라는 동사에 붙어 다니는 ‘뾰족한 어떤 것’도 문법이라고 한다. 이게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그 이름도 찬란한 의미론(semantics)이다!

의미론이야 더이상 나 알 바 아니고, 아무튼 우리는 언어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이게 정상이다. 언어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그 언어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언어 밖으로 쉽게 나가는 것. 오히려 이게 비정상이다. 자신의 모국어 시스템 속에서 잠시 떠나기 위해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고 해도 그래봐야 몇 걸음 못나간다. 사람마다의 차이는 있지만 오십 보 백 보다. 다 정도의 차이다. 똥 묻은 개와 겨 묻은 개의 차이다. 그러나 백 보에서 오십 보를 뺀 차이는 크다. 오십 보! 그리고 똥과 겨는 그 더러움에서 질적으로 비교가 안 된다.

아무튼 우리는 우리의 언어 속에서 비정상이 되어야한다. 웃기기 위해서 우리는 모국어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짓을 해야 한다. 우리가 무슨 <데미안>에 나오는 아브락삭스는 아니지만 웃기기 위해서 우리는 문법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한다. 그리고 웃기는 신에게로 날아가야 한다. 맞다. 웃기는 거 완전 힘들다.

다음은 노암 촘스키가 만든 문장이다.

색깔 없는 초록색 아이디어가 난폭하게 잠자고 있다. Colorless green ideas sleep furiously. (세종실록지리지 50페이지 셋째줄)

이럴 때 촘스키는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나는 이 비정상을 사랑한다.

모국어의 시스템, 즉 문법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자는 웃길 것이고 노력하지 않는 자는 당연히 웃기지 못할 것이다.

11. 웃긴 얘기는 웃긴다

하나마나 한 얘기지만, 그러니까 말 안 해도 그만이지만, 웃긴 얘기는 웃긴다. 그러니 남을 웃기는 방법은 의외로 쉽다. 내가 보거나 들어서 웃겼던 얘기를 그 좋은 얘기를, 그 좋은 걸 아직도 모르는, 한심하고 불쌍하고 가엾고 불운하고 불우한 사람에게 얘기해 주면된다.

어느 날 내 관심을 끌었던 누군가의 메신저 아이디는 이렇다.
거리의 신문팔이도 머리 속에 헤드라인 몇 개는 가지고 다닌다.*

사정이 이러하니 내 하나 묻겠다.
당신은 머리 속에 웃긴 얘기를 몇 개나 쑤셔넣고 다니는가?
좋은 말로 할 때 몇 개만 털어놓으라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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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어디서 많이 본거다 싶어 찾아봤더니 원문은 이렇더라.
The corner newsboy, too, has some headlines – in his head.
─ 핼 스태빈스 저/ 송도익 역, <카피 캡슐>, 서해문집. 1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