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새들이 왜 먼바다의 섬들을 떠나 리마에서 북쪽으로 십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이 해변에 와서 죽는지 아무도 그에게 설명해주지 못했다. 새들은 더 남쪽도 더 북쪽도 아닌, 길이 삼 킬로미터의 바로 이곳 좁은 모래사장 위에 떨어졌다. 새들에게는 이곳이 믿는 이들이 영혼을 반환하러 간다는 인도의 성지 바라나시 같은 곳일 수도 있었다. 새들은 진짜 비상을 위해 이곳으로 와서 자신들의 몸뚱이를 던져버리는 것일까. 피가 식기 시작해 이곳까지 날아올 힘밖에 남아 있지 않게 되면, 차갑고 헐벗은 바위뿐인 조분석 섬을 떠나 부드럽고 따뜻한 모래가 있는 이곳을 향해 곧장 날아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 설명들로 만족해야 하리라. 모든 것에는 항상 과학적인 설명이 있게 마련이다.

─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문학동네, 2001

“세상의 끝, 희망의 끝, 그 모든 끝의, 생의 비리고 안타까운 아름다움” ─ 뒷표지 볼드이탤릭고딕체의 선정성 혹은 셀링포인트

1238호 기사

1238호 기사는 이제 완전히 낯이 익다. 불편한 인연이다. 그렇다고 38호가 올 때마다 걸러 탈 수도 없고 ─ 그래봐야 아쉬운 건 나다 ─ 그냥 생깐다. 그게 영 불편하다. 물론 내색은 안한다.

지하철 포비아

나이가 들수록 묻지 말아야 할 질문은 존재론적인 질문이다. 먹고 사는데 하등 도움이 안 된다. 그러나 오늘 나는 하마터면 나는 누구이며 여기는 어디이며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고 물을 뻔했다.

오랜만에 탄 지하철 속에서 나는 명명하기 힘든 어떤 비실재감에 시달렸다. 가령, 옆자리에서 앉아서 핸드폰 너머의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사람을 보며 저 사람은 왜 자꾸 혼잣말을 하는 거지 하는 의문이 들거나, 환승통로를 걷던 사람들이 갑자기 뛰기 시작할 때 저쪽 플랫폼에 기차가 곧 도차하나보다 하는 생각보다는 어디서 무슨 일이 생겼나 사람들이 왜 뛰지 하는 생각이 들거나, 혹은 방향감각이 일순 사라져 교대 방향 플랫폼에 앉아 교대는 어느 쪽으로 가느냐고 묻는 어느 할머니의 질문에 좌우를 두리번거리게 되는 그런 순간들이 자꾸만 현전해 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얼른 손에 들고 있던 책 속에 의식을 묻었다. 오늘 따라 책 속의 이야기들도 비실재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자동차에 치인 개에 물렸던 여자가 자신의 핸드백을 날치기 하려는 강도의 팔뚝을 개처럼 물어뜯었던 이야기, 전염병이 창궐한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고양이의 자궁을 적출하고 개구리를 낳고 살아가는 이상한 사람들의 이야기 등이 그랬다. < 매그놀리아>의 하늘에서 ‘개구리 오는(혹은 내리는)’ 장면이 생각났다. 아스팔트에 떨어진 개구리들이 파열하는 장면이 텍스트 위에 오버랩 되었다. 끔찍했다.

그 끔찍한 시간을 온전히 견디고 지상으로 무사히 걸어 올라오며 나는 적잖이 안도했다. 이 황량하다 못해 폐허에 가까운 하늘빛이 다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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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대체 무슨 헛소리냐?

이게 대체 무슨 헛소리냐? 말하자면 소칼의 ‘지적 사기’ 아니냐?


대수적으로는 유한집합에서 무한집합으로의 확산이며, 위상학적으로는 공적 공간으로부터 사적 공간으로의 이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저 무한집합은 엔트로피의 무분별한 증가는 아닐까? [……] 수의 무한이 아니라 무리수가 문제가 아니겠는가? 혹은 허수나 복소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