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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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고집스럽게 계단을 오르(겠다)는 손주 녀석을 뒤를 살피며, 어머니는 녀석의 아비되는 자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신다. 어머니 보시기에 둘은 닮았다. “어쩌면 그렇게 똑 같니?” 하신다.

그러나 대물림되는 것이 어디 고집뿐이랴. 가끔은 내 대에서 제발 끊어버렸으면 하는 형질이 아이들 속에 살아 숨쉬는 걸 본다. 그럴 땐 내가 나 자신을 ‘증오’했던 만큼 아이도 미울 때가 있다. 나는 무겁고 어두운 의식을 품고 살았다. ‘더러운’ 성격하며.

한편, 나에게는 결핍되었던 형질이 아이들 속에 구현되어 있는 것도 있다. 가령, 음정과 박자를 맞추어서 노래를 부른다든가 나무를 보고 나무를 그렸는데 그게 나무처럼 보인다든가 하는 거. 아내를 닮은 것이다.

어떤 아이도 제 부모를 골라 태어나지 않듯이, 어떤 부모도 제 자식을 가려 태어나게 하지 못한다. 그건 그냥 주어지는 것이다.

아내는 사랑해서 만났다. 내 부모와 나는, 나와 내 자식은, 어쩌다 만난 것일까?

We are the gangs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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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야, 니가 우리 동생 한테 뭐라 그랬어?

__아니 그게 아니고.

__아니긴 뭘 아냐. 다음부터 조심해.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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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별것도 아닌 게 까불구 있어. 가자.

__알았어. 누나

14. 패러디하면 웃긴다

문학용어 사전에 보면 패러디는 ‘한 작가의 말, 문체, 태도, 억양과 생각 등을 우스꽝스럽게 만들 목적으로 모방해서 사용하는 것’이라고 나와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50페이지 셋째줄) 뭐든지 제대로 하려면 쉽지 않은 법. 패러디는 ‘원본과의 유사성’과 ‘원본의 의도적인 왜곡’ 사이에서 섬세한 균형감각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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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광고를 패러디한 음료광고*

웃음을 목적으로 한 패러디의 첫번째 원칙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을 패러디하라는 것이다. 내가 패러디를 하는데 상대방이 그게 무엇을 패러디 한 것인지 모르다면 많은 경우 웃기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듣기는 커녕 성격파탄자 소리 듣기 딱 좋다. 바로 이 때문에 영화, 광고, 드라마, 개그 등이 자주 패러디 되는 것이다. 좀 유식하게 말하자면 요즘 시대에는 “패러디하는 것도 패러디 이고 패러디 되는 것도 패러디이다.”라고 쟝 보드리야르가 말했다.(이것도 세종실록지리지 50페이지 셋째줄)

그러니 웃기고 싶다면 광고도 열심히 보아라. 책을 많이 읽어라. 모든 분야의 모든 책을 읽어라. 영화를 많이 보아라. 모든 분야의 모든 영화를 보아라. 아주 텔레비전 앞에서 살아라. 인터넷도 열심히 들여다 보아야 한다. 일할 시간 없다. 공부할 시간 없다. 아, 웃기자는 데 그딴 거 할 시간이 어디 있는가.

내 말 안듣고 일할 거 다하고 공부할 거 다하면서 원본으로서의 가치가 무궁무진한 영화, 광고, 드라마, 개그 등등 이런 거 안 보고 안 읽으면 패러디는 고사하고 남들이 패러디 하는 걸 보고 웃지도 못한다. 원본을 모르니 도대체 그게 왜 웃기는지 알 수가 없는 거다. 남을 웃기는 거, 이거 거저 되는 거 아니다. 노력해야 한다. 아무튼 패러디는 ‘원본’을 아는 게 재산이다. 원본!

패러디의 두번째 원칙은 ‘삐닥이 정신을 가지라는 것’이다. ‘원본’을 삐딱하게 바라보고 우습게 재해석할 수 있는 능력. 이걸 키워야 하는 거다. 이거 키우자면 영화보고, TV보고 하면서 놀러다닐 시간 없다. 그딴 거 다하면 국어사전은 언제 한번 들쳐보고, 고전은 언제 읽는단 말인가. 공부, 이거 정말 열심히 해야 한다.

footnote:
*이 따위넷에 툭하면 얼쩡거리시는 걸식이님이 이 광고의 카피를 썼다. 모르긴 몰라도 이게 걸식이님 인생의 거의 유일한 자랑이 아닐까 싶다.

만년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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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표가 다른 두 개의 만년필 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다. ─ 쟝 그르니예, <<섬>>

누군들 안그랬으랴만 나는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부러웠다. 해서 소시적엔 펜글씨 교본을 사다가 연습을 하기도 했고, 다른 사람의 글씨체를 흉내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내 오른손은 이미 너무 오랜 세월동안 나쁜 글씨체에 익숙해져 있어서 쉽게 교정이 되지 않았다. 최후의 방법은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왼손으로 몇 번 글씨를 써본 다음에 나는 나쁜 글씨체가 단지 ‘손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오른손으로 쓸 때 드러났던 꼴 사나운 글씨체는 왼손으로 쓸때도 그대로 드러났다. 문제는 내 머리가 기억하고 있는 글씨체였고, 글씨 잘 쓰자고 머리통을 딴 걸로 바꿔 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이유때문에 “그러니, 얘?”의 <<섬>>을 집어들었는데, 무심코 몇 장 넘겨보니 저 구절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 그게 언제였던가?

만년필, 참 잃어버리기도 숱하게 잃어버렸다. 누이에게 대학입학 선물로 받았던 만년필은 어디로 갔지? 아피스 만년필은? 가장 최근에 잃어버린 건 초록색 워터맨이다. 역시나 술 집에서 술 먹고……지금 가지고 있는 만년필은? 로트링 아트펜 Extra Fine! 이게 제일 만만하다.

“무엇에 부딪히거나 맞아서 피부에 퍼렇게 맺힌 피.”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 제목이 참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