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병 2

어른들이 어느 날 느닷없이 내린 모진 결정에 아이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야말로 온몸을 던져 성심껏 성의껏 저항했다. 아이는 정말 열심히 울었다. 하긴 제 까짓게 할 수 있는 게 그거 말고 또 뭐가 있겠는가. 부조리한 세상! 그저 우는 시늉만 해도 득달같이 가져다주던 우유를 이제는 아무리 열심히 울어도 주지 않으니 부조리도 그런 부조리가 없고 불합리도 그런 불합리가 없을 것이었다.

오늘 아침에 아이의 할머니는, 아이가 울다 지쳐서 설핏 잠들어서도 “우유…우유…”하면서 중얼거렸다고 말했다. “얼마나 애처로운지 아니…”라고 덧붙이시는 걸 잊지 않았다. “그 애처로운 걸 왜 시작하셨어요. 어머니. 그냥 애가 더 이상 안 먹겠다 할 때까지 주구장창 먹이면 안 되나요.” “예전에 그렇게 키운 아이는 서당 가서 천자문 읽고 와서는 제 어미 앞가슴을 풀어헤치고 젖을 먹었다고 하더라. 어차피 언젠가 한번은 거쳐야할 과정이란다.” 나는 할 말이 없었고 마음이 짠했다.

이제 이틀이 지났다. 나우도 기엽이도 이런 과정을 한 번씩 거쳤다. 그때도 내가 이랬던가. 잘 모르겠다. 하기는 밤에 나 자는데 시끄럽지만 않으면 애가 젖병을 떼거나 말거나 나하고는 ‘무관한’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아이 젖병하나 끊는데 이 유난을 떠는 건, ‘죽이는’ 꿈이나 꾸면서 잠들었다가 애 울음소리에 깨어나 보면 우는 아이 달래려고 쩔쩔매고 있는 ‘노인네’를 보는 일이 안쓰럽고, 마음 약해서 우는 아이를 업어주고 있는 아내가 안쓰럽고, 그래서 그런 것뿐이다.

자동차 사고는 ‘하이카’가 다 알아서 해주고, 아이 키우는 건 아내가 다 알아서 해주고…그러면 얼마나 좋은가. 에구구. 잠을 설쳤더니 졸리다.

젖병

1998년 8월, 나우가 태어난 후 2004년 5월, 지금까지 거의 만 6년이 다 되어가는 동안 우리집 주방 한켠에 자리잡고 있던 게 젖병이다. 더러 삶다가 태워 먹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고 해서 새 젖병을 사기도 했겠지만, 거개가 첫애부터 셋째까지 물려쓰고 있는 것이니 젖꼭지는 숱하게 갈았으되, 어쩌면 4년전에 나우가 물고 자던 젖병을 바로 어제 밤까지 언이가 물고 잠들었을 터.

오늘, 아이들의 할머니가 ‘크게 뜻한 바’가 있어 우리집에 오셔서 그 젖병을 다 치워버렸다. 젖병 떼기가 시작된 것이다.

방금 전까지 언이가 우유달라, 우유달라, 젖병에 닮긴 우유가 아니면 바나나도 싫고, 업어주는 것도 싫다, 나는 우유 줄 때까지 울란다, 하면서 통곡에 통곡을 하고, 땡깡에 땡깡을 부리다가, 종국에는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그게 15분 전이다. 지금 집안이 아주 조~용하다. 내가 이거 쓰느라고 타이핑하는 소리가 제일 큰 소리다. 사실은 이 정적을 틈타 나도 얼른 들어가서 눈을 붙이는 게 좋다. 언이가 언제 깨서 울지 모른다. 그러면 오늘 밤에 잠은 다 잤다.

그나마 지금은 곱게 잠든 축에 속한다. 이 녀석이 자다가 깨서 우유달라고 하는 데 얼른 안가져다 주면 아주 가관이다. 깽판도 그런 깽판이 없다. 무서운 것도 없고 겁나는 것도 없느니 우유 줄 때까지 울 것이다.

우유 줄 때까지 우유 외쳐라, 우유 줄 때까지 우유 외쳐라.

그런데 어쩐다냐, 언아. 어른들이 너에게 더 이상 젖병을 주지 않기 위해 합심하여 구국의 강철대오로 대동단결한 것을. 그러니 언아,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니가 좀 져 줘야겠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집에서 젖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좀 해보자.

생각해 보면 아내는 무려 6년 동안을 잠 자다가 일어나서 아이들에게 우유를 타 준 셈이니, 엄마라고 큰 소리 떵떵칠만하다. 나? 물론 나도 애 셋 아빠니 더러, 아니 아주 가끔 자다가 우유를 타주기도 했었다. 대개는 성질이나 팍팍 부렸지만.

아, 지금 이따위 블로그가 문제가 아니다. 언이 깨서 울기 전에 얼른 자야한다. 이 전격 젖병 떼기 작전이 어떻게 진행될 지 바야흐로 (나만) 흥미진진!

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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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5월 2일, 종마목장

길을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너는 본다.
무얼 보는가. 무엇이 그리 경이로운가.
네 시선 끝을 따라가 보면
내 눈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구나.

내 눈은 늘 보던 것만 보고
내 귀는 늘 듣던 것만 드고
내 입은 늘 하던 말만 하고

나는 이제 낡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