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와 은유

오래 된 집들이 철거된 자리는
쓰레기가 남몰래 버려지는
시간이 노골적으로 썩어가는
공터가 되어있다
포크레인 한 대가 땡볕 속에서 힘겹다
이제는 이런 풍경이 목가적인 풍경이다
물론 나도 휘갈겨쓴 플래카드가 나붙든 말든
목가적인 풍경 좋아하시네 하며
지나가면 그만이다 문득
이 마음을 다 철거하고 나면
나는 무슨 공터가 될까
내 마음의 공터에서 어떤 모질었던
인생이 악취를 풍기며 썩어갈까
은유적으로 생각해 보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다
낡은 집들이 철거된 자리는
널직한 공터가 되어있고 그들은
이 공터가 필요했던 것이다
밀고 다시 까는 것
나는 그새를 못참고 재개발 사업을
다시 컴퓨터에 무책임하게 비유하지만
사실 책임질 수 있는 비유는 많지 않다
그러니 지나가는 것이다
내 집은 벌써 오래 전에 철거되었으니
어머니의 항아리도 다듬이 돌도
다 두고 떠나왔으니
그런데 정말이지 이 쓸쓸한 마음마저 다
철거해 버리고 나면
나는 무슨 공터가 될까 그 공터에서도 누군가가
저 땡볕 속의 포크레인처럼 힘에 겨울까

심다공증

이 자리는 사람이 빠져나간 자리다
이 자리는 대타가 들어올 수 없는 자리다
이 자리는 이제는 당신도 비집고 들어 올 수 없는 자리다
이 자리는 다만 나의 자리다
이 자리는 텅 비어있다

나는 왜 순수한 삐짐에 몰두하지 못할까?

빌어먹을! 나도 나이를 먹기는 먹었나부다.
어떻게 삐진 게 단 이틀을 못가냐?
왕년에는 한번 삐지면 다시는 얼굴을 안 보기도 했었는데…
슬프다.
이제 삐질 만한 일도 자꾸만 줄어들어간다.

등나무 그늘에서

이봐 그쪽으로 가지마 그쪽으로 가면 안 돼 그쪽에는 아무도 없어 그러나 굳이 아무도 없는 쪽으로만 뻗어나가는 등나무 가지 하나 허공을 움켜쥐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움켜쥐어도 그건 그저 허공이다 허공은 빌 ‘허’ 자에 빌 ‘공’ 자를 쓴다 그러고 보니 어느 결에 나도 빌 ‘허’ 자에 빌 ‘공’ 자를 쓰게 되었나 보다 이제 내게로 가지를 뻗어오는 이는 나를 만나지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