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금기

엽이가 언이의 사진을 오렸다고 우가 와서 일렀다. 과연 그랬다. 나는 사진은 오리는 거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언이는 자기가 오리라고 그랬다고, 그러니 괜찮다고 말했다. 나는 어/쨌/든/ 사진은 오리는 거 아니라고, 다시는 오리지 말라고 말했다. 나는 왜 사진은 오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엽이가 오려놓은 언이의 사진을 본 아내가 누가 그랬느냐고 물었다. 자초지종을 말해 주었다. 부부간의 대화를 들었는지 컴퓨터를 하고 있던 언이가 쪼르르 달려나와 자기가 오리라고 그랬다고, 그러니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자기도 사진을 오려도 되냐고 물었다. 나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왜 사진은 오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언이는 방문을 닫고 들어 갔다. 나는 녀석이 삐졌나보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얼마 후, 언이가 손을 등뒤로 감춘 채 나왔다. 손에는 사진에서 오려낸 제 모습이 들려 있었다. 녀석의 얼굴에는 득의가 양양했다. 나는 두 번 다시 오리면 안 된다고, 한 번만 더 오리면 아주 혼내 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왜 사진은 오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사진에, 따라서 그 기억에, 따라서 내 정체성에 길길이 방화한 적은 있어도 사진을 오린 적은 없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금기가 없는 아이들이 무섭고 부럽다.

따위 자전거포

찾아가지 않으면 반출하겠다는 공고와 함께 자전거들이 수위실 옆에 며칠 동안 진열되어 있다. 사지육신이 멀쩡한 놈은 거의 없다. 자전거라면 워낙 사족을 못 쓰는 지라 수위 아저씨께 말씀 드리고 개중에 쓸만해 보이는 놈을 골라 들여와 수리를 시작했다. 멍키 스패너로 눈에 보이는 모든 너트를 풀어 자전거를 완전히 해체하고, 걸레를 빨아가며 먼지와 기름때를 닦아 냈다. 자전거포에 가서 부품을 무려 2000원 어치나 사서 튜브에 끼우고 쭈글쭈글한 바퀴에 바람을 넣고, 다시 가조립을 해보았다. 진단 결과, 느슨해진 체인을 팽팽하게 당기고 브레이크만 손보면 아쉬운 대로 탈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기름칠─WD40이라는 훌륭한 제품이 있다─은 해야지. 욕심 같아서는 도색도 새로 하고 싶지만 그건 일이 너무 커질 것 같아 꾹 참아야 할 것 같다. 오늘 밤에도 자전거가 바람에 스치운다.

나오느니 한숨이로다.

황야의 마녀의 마술에 걸려 한 순간에 팍 늙어버린 소피는 여차저차 해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입성했다. 그곳에는 꽃미남 하울과 그의 똘만이 마르크가 살고 있었다. 소피와 하울과 마르크가 함께 하는 아침 식사 시간, 마르크가 제대로 된 아침은 정말 오랜만이라며 게걸스럽게 먹는다. 그 모습을 본 소피는 이렇게 중얼 거린다. “가르쳐야 할 것이 많겠어.”

아이들이 갑자기 윷놀이를 하겠다고 설치더니 내게 기본적인 규칙을 물어본 다음 곧장 본 경기에 돌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관여하지 않고 나 할 일 하고 있다가 잠시 뒤돌아 보니─ 그렇다. 그들은 내 침대에서 놀고 있다. 시끄러 죽겠다. ─ 말을 놓는 게 영 엉망이다. 윷놀이의 묘미는 업고 가는 것인데, 아이들은 그냥 하나 씩 하나 씩 나오는 대로 정직하게 움직이고 있다. 저래가지고 대저 어느 세월에 경기가 끝나겠는가. 정말 가르쳐야 할 것도 많다.

그밖에도 가르쳐야 할 기본적인 아이템을 열거해 본다. 원카드, 하이로, 세븐오디, 훌라, 고스톱, 육백, 뻥, 섰다, 운수 떼기, 바둑, 오목, 장기, 체스, 다이아몬드 게임, 오델로, 풍선껌 불기, 휘파람 불기, 지뢰찾기, 3X3X3 큐브 맞추기 등등. 이 많은 걸 다 전수해 주려니 나오느니 한숨뿐이로다. 오늘 밤에도 한숨이 바람에 스치운다.

p.s.
여기서 따위넷 3주년 기념 막간 퀴즈 하나: 위에 열거된 온갖 잡기들 가운데 따위와 가장 어울리지 않으며, 동시에 그가 할 줄 모르는 것은?

달리지 못하는 질주

계절의 주차장에 오래 머물러 있던 자동차의 시동을 걸고 가속 페달을 밟았다. 느티나뭇잎 하나가 와이퍼 밑에서 쓸쓸하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나는 자동차의 속도를 높여 나뭇잎을 굳이 떼어냈다. 나뭇잎은 공중으로 잠시 솟구쳐 올랐다가 아스팔트에 떨어졌다. 느티나뭇잎이 떨어진 네거리에 직진 신호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워셔액을 뿌려 창문을 닦았다. 고작 나뭇잎 하나에 시계가 흐려지다니. 가족에 대한 의무감이 안전벨트를 매게 하는 나이. 미동도 없이 또 한 계절을 지나가는 발작들. 달리지 못하는 질주들.

 

 

 

오늘의 문장

“그것[자연의 기하학]은 우리의 가옥이나 도로 등에서 발견되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아니라 숲속의 나무들과 그 줄기, 가지 그리고 뿌리에서 발견되는 프랙탈 기하학입니다.”(p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