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겨울 여주는 너무 추웠다. 영하 25도로 기온이 떨어진 어느 날 밤, 평소대로 밖에서 자던 동네 똥개 몇 마리가 조용히 얼어 죽었다. 미안하다. 내가 니 생각을 미처 못했구나. 웅크리고, 웅크리고, 웅크리다, 죽어 갔을, 자신이 밥 먹여 키우던 개의 싸늘한 몸뚱이를 보며 개주인들은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2.
엠본부에 아직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이 살아 있는지 모르겠다. 텔레비전을 안 보고 산지가 제법 돼서 저런 세상사에 어둡다. 덕분에 우리집 ‘자제분들’도 대중문화생활을 거의 못하고 있다. 이 점은 애비로서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텔레비전 보는 것,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

아무려나 <이제는 말 할 수 있다>라는 제목을 접할 때마다 그때는 왜 말 못했는데? 이제는 말해도 안전하다 이거지? 그런데 지금은 속 시원하게 말하는 거 맞아? 겸손하게, <이제야 겨우, 그것도 모기 소리 만하게, 말한다>로 타이틀을 바꾸는 게 어때? 하면서, 오래된 표현으로, 마음이 한 없이 삐딱선을 탔던 기억이 있다.

죽지 않고 버티면 언젠가 <또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는 조금은 자조적인 제목으로 방송이 오늘의 여러 사태를 말 할 수 있는 날이 오려는가?

3.
……

에라스무스

엊그제 삼일절 태극기가 축 늘어져 있던
우리동네 아이들 학원 버스 기다리는 곳 가로등 기둥에
내 자식들 무상으로 밥 먹여주는
국가가 트럭 타고 와서 꽂아둔
민방위 깃발이 오후 2시의 사이렌을 예고하며
불안스레 펄럭이고 있다
소심한 에라스무스는 이쪽저쪽 갈 곳이 없었다

컴퓨터는 절대 항복하지 않는다

우리집 남자 사람들은 주로 셋이 편을 먹고 컴퓨터 두 마리를 무찌른다. ‘다이다이로’ 붙으면 이기기가 힘드니까 좀 치사하지만 그렇게 치수를 조정하는 것이다. 종족은 모두 테란이다.

컴퓨터는 초반에 빠른 속도로 마린과 메딕을 생산해서, 더러는 탱크까지 앞세우고 우리 중 한 명에게 쳐들어온다. 지원병력을 보내든, 쥐새끼 한 마리 드나들지 못하도록 입구를 봉쇄하고 SCV를 다 동원해 벙커를 수리하든, 배럭과 컴맨드센터를 띄워 도망가든, 어떻게든 이 초반 공격만 막아내거나 피하면 천재지변이 없는 한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된다. 장하다.

초반 공격에 실패한 컴퓨터가 전열을 가다듬으며 재기를 노리고 있는 동안 우리는 힘을 합쳐 불쌍한 컴퓨터를 공격한다. 더 열심히 자원을 캐고 더 열심히 유닛을 생산한다. 해설도 하고 중계방송도 하고 작전도 짠다. (여기 스캔 한 번만 찍어줘. 알았어.)

컴퓨터와 게임을 하면 장점은 컴퓨터가 민첩하기는 하지만 워낙 멍청해서 웬만하면 우리가 이긴다는 것이다. 도박판에서 돈 잃고 속 좋은 놈 없듯, 게임판에서도 지고 기분 좋은 놈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기는 게임만 하는 것이다. 단점은 실력이 영 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컴퓨터는 절대 항복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컴퓨터와 겨루어서 이기려면 최후의 건물 하나까지 다 파괴시켜야만 하는데 수십 대의 탱크와 마린을 떼거지로 몰고가 방어력이 전혀 없는 컴퓨터의 마지막 보급창까지 모조리 없애고 있다 보면─이걸 전문용어로 엘리미네이트, 줄여서 엘리라고 한다─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건가, 하는 의식이 돌아오며 스스로가 한심해 지곤 하는 것이다. 괴롭다. 좋은 아빠는 하는 짓이 유치하다고 애써 자위해 보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다.

그때마다 컴퓨터도 gg를 칠 줄 알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책을 읽다가 다음 구절이 눈에 번쩍 들어왔던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얼마 전에 캐나다에서 있었던 컴퓨터 체스 대회에서, 승부가 나기 전에 시합을 끝내는 진귀한 속성을 가진 프로그램─경쟁품 중에서 성능이 가장 낮은─이 선을 보였다. 이 프로그램은 체스를 썩 잘 두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판세가 희망이 없으면, 그 다음 수를 생각하는 지리멸렬한 장고를 늘어놓는 여타 프로그램들과는 달리 즉시 시합을 포기할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지기는 하지만 품위를 지킨다고 할까.”

책 제목은 밝히고 싶지 않고, 문단의 소 타이틀이 “체계로부터 벗어나기”라는 것만 적어둔다.

p.s.
다음의 인용문은 과거의 독서의 기억을 더듬어 다른 책에서 찾아 낸 것이다. 그 과정이 어렵지는 않았다. 책 말미의 인명 색인에서 괴델을 찾아 해당 페이지로 직행 했으니까.

“오스트리아의 수리논리학자인 쿠르트 괴델은 공리들의 체계가 결코 자체에 기반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했다. 일관성이 입증되려면 그 체계 밖에서 나온 진술을 이용해야 한다. ‘괴델의 정리(定理)’에 비추어볼 때 비모순적이고 내적으로 일관된 세계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압력 밥솥

2월 하순에 압력 밥솥을 새로 샀는데 압력추가 제대로 작동을 안 한다. 서너 번 밥을 더 해봤으나 마찬가지다. 그대로는 못쓸 것 같아서 제조업체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더니 압력이 새는 것 같다며 고무바킹을 새것으로 보내준단다. 그러나 새 고무바킹을 장착하고 밥을 해도 달라진 게 없다.

삼일절 연휴를 보내고 화요일 날,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이번에는 밥솥을 택배로 보내란다. 그것도 증상을 간단하게 메모해서 밥솥에 넣어가지고. 그래야 기사가 점검하는데 도움이 된다면서.

수요일 날, 요구대로 메모를 해서 우체국 택배로 밥솥을 보냈다.

목요일 날, 일전에 보내준 고무바킹은 잘 받으셨느냐는 전화가 왔다. 이럴 때 헐, 하는 거 맞겠지. 상황을 전했더니 그러시냐고 죄송하게 됐다고 안녕히 계시라고 전화를 끊는다.

금요일 날 그러니까 어제, 기사라는 사람의 전화가 왔다. 두 차례 압력시험을 해봤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고, 추만 잘 돌고 밥도 잘 된다고,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거냐고, 그는 말했다. 혹시 몰라서 고무바킹과, 압력추 옆에 김 빼는 데 쓰는 밸브도 새것으로 교환해서 다시 보내 드릴테니 잘 쓰시라고 했다.

토요일 날 그러니까 오늘 오전, 밥솥이 다시 왔다. 설레는 마음 반, 불안한 마음 반으로 밥을 지었다. 달라진 게 없다. 압력추는 여전히 꼼짝도 않고 피식피식 김 빠지는 소리만 난다. 김 샜다.

압력 밥솥은 열을 받아 내부의 압력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김이 빠져 나오면서 압력추가 돌도록 설계 돼있다. 소비자도 열을 받아 내부의 압력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김이 빠져 나오면서 슬슬 꼭지가 돌게 돼 있다.

월요일 날, 고객센터에 다시 전화를 걸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