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언맨하고 배트맨하고 싸우면 누가 이길까?

일요일 오후, 영화가 한창 클라이막스를 향해 치달아가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동생들 데리고 놀러나간 딸이다.

여보세요?
아빠.
왜?
응, 우리 지금 끝말잇기 하는데 ‘늘보’라는 단어가 있어?
몰라.
에이.
그냥 취소하고 처음부터 다시 해.
안 돼. 우리 지금 아이스크림 내기했단 말야.
오우, 그래? 알았어. 전화해 줄게. 기다려.

보던 영화 멈춰 놓고 사전을 찾는다. 있다. 늘보. 명사. 느림보의 준말. 전화 건다.

어, 나우야. 찾아보니 있다. 느림보의 준말이란다.
얏호.
끊어.
야, 있대. 있대. (fade out)

있든지 말든지, 나는 보던 영화나 마저 본다. 배트맨 신세 참 처량하게 됐군. 레이첼에게 버림 받고, 레이첼은 죽고, 지가 버림받은 줄도 모르고, 쿨한 척 스스로 누명 쓰고……
그런데 아이언맨하고 배트맨하고 싸우면 누가 이길까?

p.s.
현장에 있다가 방금 귀가한 막내에 의하면 아직도 그 단어가 있다 없다 하면서 티격태격하고 있다고 한다.

밤의 공원에서

저녁 먹고 공원에 나와 자전거 타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이렇게 앉아 있으면 산다는 게 근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느 새 아이들은 자전거를 세워두고 그네를 타는데 저 만큼에서 쓸쓸하여라 유년의 한 기억이 나를 덮치네 텅텅텅 흙바닥에 농구공 튕기는 소리 들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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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나 좀 늦을거야.
왜?
응, 복도에서 뛰다 걸려서 명심보감 쓰고 가야돼.
알았다.

자식들이 이런 일을 당하면 나도 모르게 신난다. 커서 나처럼 안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다녀왔습니다.
오냐. 근데 명심보감은 뭐썼냐?
응, 그게…..
방금 쓰고 왔다면서 그걸 몰라?

아이는 책가방에서 공책을 내민다. 읽어보니 나도 모르겠다. 공책 말미에 “앞으로는 급한 일이 있다고 해서 복도에서 뛰지 않겠습니다”라고 씌여있다.

야, 급한 일이 있는데 어떻게 안 뛰어?
그야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지.
근데 복도에서 왜 뛰었냐? 급한 일이 뭐였어?
응, 그게 우리 모둠의 모든 애들이 1교시 쉬는 시간까지 우유를 다 먹으면 급식을 먼저 먹을 수 있거든. 그런데 우리 모둠이 여섯 명인데 한 남자애가 안 먹겠다고 우유 놓고 도망가서, 그거 먹이려고 뛰어다니다가 걸렸지.

듣고 보니 참 급도 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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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어디라도 가볼까 하고 길을 나서면 출발한지 5분도 안 돼서 얼마나 남았냐고 묻는 게 내집 아이들이다. 아는 랜드마크가 63빌딩과 ‘앗, 타이어 신발보다 싼 곳’ 밖에 없느니 얼만큼 왔는지 얼마나 더 가야하는지 알턱이 없다.

현재 위치도 목적지도 모르니 집에서 300미터만 벗어나면 세상은 ‘전쟁의 안개’가 자욱한 스타크래프의 맵하고 별로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출발전에 지도도 몇 번 보여주고, 잔소리도 몇 차례 해봤는데 아무 소용이 없다. 나는 젖먹이 때 엄마 등에 엎혀 가면서도 손가락으로 방향을 지시했다는데 저것들은 누굴 닮았서 그런지 모르겠다.

오늘 도서관 신착 도서 코너에 혹시 볼만한 책이 들어왔나 살펴보다가 지리정보 어쩌구 하는 책을 무심코 집어들게 된 까닭은 아마 저런 연유였을 것이다.

이 책, 뜻밖에 재미 있다. 위도, 경도, 축적 따위 말고도 알아두면 유익할, 재미 있는 개념이 가득하다. 이거 좀 들여다 보면 GIS에 대해서 잘난척 좀 할 수 있으리라. 천상 되다만 먹물인 것이다, 나는.

아빠, 얼마나 더 가야돼?
니가 그런 질문을 반복적으로 하는 건 “지리적 문제” 해결 능력이 없기 때문이야. 지리적 문제가 뭐냐 하면 말이지…..

나는 내가 역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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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나 내일 안전 어쩌구 그리기 대회 하거든. 근데 갑자기 아이디어가 팍 떠올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