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 홍길동이 되는 게 아니다

자식놈이 하두 지 엄마 편만 들고 하늘과 같으신 본 아버님의 말씀은 바나나 껍질 보듯 여기는 지라, 애비된 자로서 눈물을 머금고 호부호형을 금지할 수 밖에 없었는데…

“너는 앞으로 아빠한테 아빠라고 부르지도 말거라.”

그러자 녀석은 비탄에 잠기거나 길동이처럼 가출할 결심을 하긴는 커녕 거 뭐 어렵냐는 듯이 이렇게 대꾸했다.

“네. 파더.”

나는 쑥떡을 주었는데 너는 왜 개떡이라 하는가

관리자 메뉴에 로그인 했다가 드래프트가 100여개가 쌓여 있는 걸 발견하고 하나 눌러 봤더니 다음과 같은 게 나왔다. 2009년 9월 22일의 글이다. 그때 이걸 적어 놓고 왜 포스팅을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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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떼멍이, A4용지와 4B연필을 들고 거실 바닥에 없드려 창작 활동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이 때 아빠의 목소리가 들린다. “떼멍이 모르게 우리끼리 사과 다 먹자.” 우리의 떼멍이 어라, 이게 뭔 소리래, 하면서 돌아보니 아빠가 누나 형아와 함께 사과를 먹고 있다. 자기들끼리. 쑥떡쑥떡거리면서. 우리의 떼멍이, 배신감을 느낀다. 어떻게 할까 고민한다. 치사한 세상이다. 난 누굴 믿고 살아야 하나. 일단 삐쳤다는 제스처를 취하기로 한다.

아빠가 달래주면 못이기는 척 사과를 먹을 것이고 달래주지 않으면 진짜로 삐져버릴 것이다. 그땐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래도 아빠는 아빠다. “야, 너희들 사과 먹지마. 이거 떼멍이 혼자 다 먹어. 아이쿠, 이게 제일 크네.” 떼멍이, 일단 사과는 받아들었지만 분이 풀리지 않는다. 나만 빼고 지들끼리 사과를 먹으려 하다니, 앞으로는 적들의 동태를 잘 감시해야 겠다, 오늘 밤에도 사과가 바람에 스치운다, 고 생각한다.

아빠가 묻는다. “떼멍아, 아빠가 정말로 너 몰래 우리끼리 사과를 다 먹으려고 했으면 우리끼리 사과 먹자는 말을 네가 들을 수 있게 했을까, 아니면 들을 수 없게 했을까?” 떼멍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한다. “그야 들을 수 없게 했겠지.” “그럼 왜 아빠가 큰 소리로 말했을까?” 떼멍이, 잠시 생각한다. 잘 모르겠다. 사과는 맛있다.

아빠가 말한다. “너 사과 먹으란 얘기를 재밌게 하느라고 그런 거야. 그러니까 아빠가 떼멍이 모르게 우리끼리 사과 다 먹자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면 삐질 것이 아니라 아 울 아빠가 나보구 사과 먹으라고 하시는구나,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구나, 내가 엄마 복은 없지만 그나마 아빠 복은 있구나, 하면서 마치 아빠랑 누나랑 형아랑 몰래 먹는 것을 네가 발견했다는 듯이, 한번만 더 그러면 정말 재미 없을 줄 알라는 듯이 연기를 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연기는 천연덕스렙게 해야 하는 거야. 내 개떡이 무슨 쑥떡인지 알겠느냐?”

떼멍이가 생각한다. 아, 그게 그렇구나. 하지만 아빠 개떡은 늘 너무 어려워. 그냥 사과 먹으라고 하면 좀 좋아.

Last edited on September 22, 2009 at 9:55 pm

고양이와 고라니

1.
편의점 가는 길, 고양이 한 마리가 아스팔트에 고인, 살얼음이 언 물을 핥아 먹으며 갈증을 해소하고 있다. 혹시는 허기를 달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양이는 내게 경계의 눈빛을 보내며 여차하면 달아날 준비를 한다. 새삼스럽지만 세상은 위험한 곳이다. 내가 고양이에게 해줄 수 있는 배려는 못본척 녀석을 멀리 우회하는 것 뿐이다.

2.
교회 앞 도로, 새끼 고양이가 이제는 눈이라 부를 수도 없는 잔설 무더기 위에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냉동돼 있다. 객사한 고양이의 살짝 벌어진 입안에 드러난 이빨이 날카롭다. 그런데 객사라고? 야생 고양이는 객사할 운명이 아니던가.

3.
얼마 전에는 아내가 국물 내고 건져둔 멸치를 슬며시 가져다가 고양이가 자주 지나다니는 길목에 놓아두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흔적이 없다. 다저녁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 거실 테이블에 며칠째 방치돼 있던, 구운, 마른, 딱딱한 오징어를 고양이 길목에 놓아두었다.

4.
누군가에게 전화가 온다. 고라니가 비닐하우스에 들어와 상추를 다 먹어대니 잡아달라는 전화다. 연전에 유튜브에서 본 덫을 설치하는 영상이 순간 머리를 스쳐간다. 방법을 알아보겠노라 대답하고 전화를 끊는다.

마지막 단어들

많은 일들이 오래 전 기억이었다. 작년이나 재작년 일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고독 자유 불면 사랑 문학 철학 혁명, 젊은 시절 그는 이런 뜨거운 말들을 부끄러움도 모르고 연애편지에 적었으나 말년에 그가 그 뜻을 온전히 아는 언어는 녹내장처럼 슬픈 말들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는 어디서든 삐뚜로 서 있는 것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살아 있는 묘비였다. 불길 속에서 타들어 가던 그의 관속에는 몇 개의 허망한 어휘들만 들어 있을 뿐, 가파른 문장 하나 들어 있지 않았다. 그 허망한 어휘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