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타인의 고통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이후, 2004
내가 이 책을 사던 날, 그러니까 2004년 4월 22일 북한의 평안북도 용천역에서 대폭발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국내 언론이 보여줄 수 있는 그림이라고는 고작 폭발이 있기 전의 위성사진뿐이었다. 다음날 혹은 그 다음날 폭발로 인해서 ‘깊게 파인 웅덩이’를 찍은 사진과 폐허가 된 ‘룡천소학교’ 사진이 외신을 타고 들어왔다. 깊이가 10m에 달하는 웅덩이가, 그리고 꼭대기 층이 완전히 날아가 버린 학교 건물의 모습이 당시의 폭발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다음날 혹은 그 다음날 마침내 부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북한 어린이들의 모습을 촬영한 장면들이 신문에 나고 텔레비전에 방영되었다. 화상을 입고 기본적인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신음하고 있는 모습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사진은 뭐하는 물건인가. 그것은 뭔가를 보여주는 물건이다. ‘뭔가’는 부정형이니 이제부터 그냥 ‘이미지’라고 부르기로 하자. 다시 말하자. 사진은 ‘이미지’를 보여준다. 사진은 피사체를 대상화하고, 현실을 추상화한다.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고 대상의 ‘이미지’이다.
이 책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책의 제목처럼 ‘고통’이다. 그것도 ‘나’나 ‘우리’의 고통이 아닌 ‘타인’의 고통이다. 타인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나 혹은 우리는 사진을 통해서 타인의 고통을 이미지로 본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기도 하지만, 타인의 고통에서 눈을 돌리기도 한다. 우리는 결국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우리가 타인이 고통 받는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고? 물론!
인간에게는 “뭔가 소름끼칠 만큼 섬뜩한 것을 보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 “고통 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고, “전쟁은 도저히 보고 싶어 견딜 수 없는(…)소식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매혹적인 육체가 외부의 공격을 받는 광경을 보여주는 모든 이미지들은 어느 정도 포르노그래피”이고, “의도했든 안했든, 나머지 우리는 관음증환자이다.”
사진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사진은 대상을 이미지화 한다. 사진에 찍히지 않은 ‘민생 살피기’는 민생 살피기가 아니다. 정치인들은 사진 찍히기 위해서 민생을 살핀다. 아니 민생을 살피는 이미지를 연출한다. 심지어 “사진에 찍혀야만 그 전쟁이 ‘현실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고통들은 이제 ‘이미지’화 되어 유통되고 소비된다. 그게 전부다. 이게 문제다. “사방팔방이 모조리 이미지로 뒤덮인 세계에서는[…]우리는 완전히 무감각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진이 먼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통을 우리 눈앞에 가져온다는 걸 알았다고 해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외면하는 방법이 있다. 수잔 손탁이 1993년에 만난 사라예보의 한 여인의 말을 들어보자. “세르비아인들이 크로아티아를 침략했던 1991년 10월 저는 깔끔한 제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사라예보는 평화로웠죠. 제 기억으로는 저녁 뉴스에서 부코바르가 파괴되었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는데, 그곳은 이곳에서 몇 백 마일밖에 안 떨어져 있어요. 그때 전 이렇게 생각했더랍니다. ‘아, 끔찍한 일이군.’ 그리고는 채널을 돌렸습니다. 저도 그랬는데, 프랑스나 이탈리아나 독일 사람들이 매일 이곳에서 벌어지는 살육 소식을 저녁 뉴스로 보며 ‘아, 끔찍한 일이군’이라고 한 마디 하고는 딴 프로그램을 본다고 해서 화를 낼 수는 없지 않겠어요? 늘 그런 식이죠. 사람이란 그런 존재입니다.”
이렇게 외면하게 되는 동기는 우리가 덜 도덕적이어서가 아니다. 무력감 때문이다. 그 일련의 사태에 대해서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거 남의 얘기가 아니다. 내 얘기다. 이라크 팔루자에서 미국이 끔찍한 살육을 저지르고 있다는 뉴스를 보면서 내가 취하는 행동이다. 술자리에서 부시는 개새끼다라고 말하고 나면 땡이다.
두 번째는 연민의 감정을 품는 것이다. 그러나 연민은 어쩌면 자기 기만적이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연민은 변하기 쉬운 감정이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런 감정은 곧 시들해지는 법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하란 말인가. 수잔 손탁은 우리에게 이거를 하라고 한다. 즉 “우리의 특권이(…)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그러나 결국 “‘우리’, 즉 그들이 겪어 왔던 일들을 전혀 겪어본 적이 없는 ‘우리’ 모두는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알아듣지 못한다. 우리는 전쟁이 얼마나 끔찍하며,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런 상황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리는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전쟁이 벌어지던 바로 그때에 포화 속에 갇혔으나 운 좋게도 주변 사람들을 쓰러뜨린 죽음에서 벗어난 모든 군인들, 모든 언론인들, 모든 부역 노동자들, 독자적인 모든 관찰자들이 절절히 공감하는 바가 바로 이점이다. 그리고 ‘그들‘이 옳다.”
소비되어 버리는 이미지들,
술자리의 이야기나
안락의자 안에서의 연민…
사실 세상은 그런 이미지로 넘쳐납니다.
수잔 손탁의 태도라는 것,
이 고통과 나의 특권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하는 것도
무력한 지적 허영의 경계를 오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반성적 태도를 지닌, 소위 지성인 아니라면 불가한 이야기이겠지요.
그러나 이미지는 소비되기도 하지만
엄연히 사람의 중심을 붙들기도 합니다.
중심을 붙든다는 것은
내 안에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이겠지요.
물론 그 경우가 지극히 드물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 또한 남다른 수용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미지라는 단어를 많이 써오다가
창세기를 읽던 중.
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빚었다…라고 할 때
그 형상이 image로 번역된 것을 보고
오랫동안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미지란 신, 다르게 말해서 절대의 본체,
그 자체는 아니지만
절대의 부분은 지니 어떤 것.
비록 많은 경우에 이미지는 가려지고 훼손되고
싸구려로 전락하지만
진정한 이미지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다만 우리 앞에 절대적으로 선하고 전능한 이미지가
없는 것이지요.
저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바른 이미지는 신의 파편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고,
그 파편이 본체로 더욱 다가가는 이미지가
참으로 좋은 이미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지는 본체와 독립하여
엄연히, 물질적으로 존재하지만,
또한 엄연히 절대와 연결 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 엄연한 분리성이란 것은
오랜 서구 철학의 관성에서
둘 사이에 심연을 놓음으로 생기는
절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그 관계가 실낱같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다르면서도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대체물도 아닙니다.
이것을 설명할 적절한 언어가
지금은 제게 없네용…
역사상 위대한 예술가들은
이미지의 창조성을 믿었던 사람이고
그러한 이미지의 창조성은
사진의 시대라고 해서 없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진이 증언으로 쓰였을 때의 열광,
그리고 그것이 소비물로서 전락했을 때의 허무.
그 영광과 몰락의 역사 속에 손탁은 걸쳐져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손탁을 읽지 않고 이렇게 떠들다니…
흠 결국의 저의 이상한 이미지론이 되어버렸군요.
그리고 이미지란 것도
가치중립적인 것이고 그것이 어디에 놓여있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주는 것일 것입니다.
아마도 손탁의 절망감은 미디어의 권력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정한 의도에 의한 자리매김이 아니라
그것이 진정으로 놓여져야 할 자리에 제대로 놓여진다면,
이미지의 창조는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이상한 횡설수설을 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지만 암튼…
무슨 포럼이나 세미나는 아니니…
마분지님 말씀은 무슨 말씀이신지 알것 같습니다. 휴~
이미지, 어려운 주제죠. 눈만 뜨면 뻔하게 보이는 게 이미지들인데 그것에 대해서 사유한다는 건 눈꺼풀 들어올리는 것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니…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건 책 제목이 “Regarding the Pain of Others”이지 “Regarding the Image of the Pain of Others”가 아니라는 거겠지요.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 뿐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무엇인가를 보고 내가 ‘연민’을 느낄 때…난 언제나 괴롭다…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눈물 한방울 찍 흘리고 나면…난 착한 놈이 되는 것이고…그렇게 날 속이는 거고…세상을 속이는 거고…하루치 술값도 안되는 돈을…전화기 꾹꾹 눌러 기부한다 해도…그것 또한 얼마나 자기만을 위한 마스터베이션인지…
내가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싸운다고 믿었던 시절에도…그건 순전히 ‘도덕적 경쟁심’에서 비롯된…’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나의 희생, 나의 자기 부정’이 아니었냐는…그런 생각에 이르고 나면…인생 뭐 있나…결국 지를 위해 사는 거지…라고 뇌까리게 되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의 총량을 줄이기 위해….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최소한의 신념만은 여전히 남아있다는…그게 결국 내 마음 편하자고, 남들에게 선한 사람으로 보이고자 하는…지극히 이기적인 행위일지라도…
그렇군요…
헤드라인을 읽지 않는 이 오랜 습성 때문에
엉뚱한 이야기만 하였네요.
하지만
타인의 고통,
그것을 타인의 시선으로 보도록 만드는
이 어슬프고도 정교한 장치,
말하자면 미디어, 정치적 권력,집단 무의식 들의 문제이지요.
나 또한 얼치기 먹물의 한계에 붙들린 부분이 여전하지만,
기성의 제도라는 것들에 대해서
부정하는 마음으로써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에 또한 조용해지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겪었던 온 나라의 난리와
그 후의 선거를 통한
어정쩡한 결과들.
그것을 결과론적으로 허무하게 생각하지 않듯,
이미지에 대하여서도,
타인의 고통을 연민의 대상으로,
소비물로써 끝없이 확대 재생산 하고 있는
이 놈의 체계 속에서도
이 놈의 체계가 희망적으로 바뀌리라는
그런 희망이 없다면 아무 것도 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의 궁극은
믿음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안녕히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은 정확히는 “전쟁”에 대한 책입니다.
전쟁, 지금도 벌어지고 있죠.
그리고 ‘우리’는 이라크에 자국군을 파병하기로 한 나라의 국민이지요.
그게 전부죠.
“그럼 안녕히” 아무래도 이 말이 마음에 걸려 ‘6mm’게 가봤더니 사이트가 닫혀있군요. 무슨 일이신지…
많이 답답해서
문 닫아걸고 그냥 두문불출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심결에 써버렸는데
여기는 수정이라는 것이 없군요…ㅠㅠ
심려를 끼쳤다면 죄송…
두문불출. 그거 좋지요. 더 좋은 건 여행인데 매인 몸이라 쉽지 않으니…
수정 안되는 거. 이 블로그 솔루션 (movable type)이 그게 불편하지요. 일종의 “낙장불입” 시스템이죠. 관리자를 제외하면 한번 쓰면 끝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