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베어 지음, 곽인찬 옮김, <<악마와의 동침>>, 중심, 2004
걸프전이 나던 해 어느 날 세상에 함박눈이 내렸다. 동네 아이들이 골목에 몰려 나와서 눈싸움을 했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두 편으로 갈렸는데 서로들 자기네가 ‘다국적군’이라고 우겼다. 아이들이었지만, 아니 아이들이었기에 더더욱 ‘다국적군’이라는 ‘정의의 타이틀’을 양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걸 양보한다는 건 자신들이 다국적군의 적, 즉 ‘악’이 된다는 건데 차라리 눈싸움을 안 하면 안했지, 그건 도대체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으니까. 아이들의 눈싸움은 결국 두 정의의 다국적군의 싸움이 되었다.
그 다국적군을 뭐라고 부르던 간에,
10여년이 흐른 후 그들은 다시 이라크를 찾았다. 한국군은 2005년 1월 현재 그 ‘다국적군’의 일원이다. 그리고 다 알다시피 그 다국적군은 명백한 침략군이다. 모르는 일이다. 혹시는 그날 눈싸움을 하던 아이가 자라서 드디어 그 대망의 ‘다국적군’이 되어 이라크에 파병되어있을 지도.
“워싱턴과 사우디 왕가의 추악한 거래”가 이 책의 부제이고 이 게 이 책의 주제다. 책은 사우디 왕가와 워싱턴 양쪽을 두루 살피고 있으나 이 독후감은 사우디 위주로 적으려 한다.
엊그제 술자리에서 이 책 얘기를 꺼냈는데 듣던 이들이 ‘열라’ 황당해 했다. 결국 “음모론”이라는 단어까지 나왔다. 음모? 글쎄.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이 책은 지금껏 내가 제대로 생각해 본적이 없는 구체적인 고민거리들을 던져주었다.
이 책 앞부분에 아프리카 북동쪽, 중동지역, 인도, 중앙아시아, 터기, 아르메니아에 걸친 지도가 나온다. 책을 읽으며 지리감을 읽히느라 자꾸만 그 지도를 보아야 했다. 지도가 나와 있는 바로 다음 장에는 “사우디 왕가의 주요 인물들”이라는 제목으로 주요인물을 소개해 놓았다. 보자.
1932년에 이븐 사우드가 사우디아라비아를 통합하여 1953년 사망할 때까지 통치했다. 그는 최소한 4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8명은 스무 살 전에 사망했다고 알려졌다.
나머지 아들들 중 ‘주요’ 아들들은 근황은 이렇다.
파드: 형식상 현 국왕. 1995년 뇌졸중으로 기능 상실. 즉, 살아서 헛 것인 상태. 그러나 그의 생존은 왕위후계문제와 복잡하게 맞물려있다.
술탄: 국방장관 겸 사우디아라비안 에어라인 회장, 주미 대사로 장수하는 반다르 왕자의 아버지.
투르키: 9.11 테러 공격이 터지기 바로 며칠 전 사우디 정보기관장에서 사임. 왕자들 가운데 탈레반과 가장 가까움. 빌 클린턴과 함께 조지타운 대학에서 수학.
살만: 리야드 지사로 40년 넘게 재임. 알카에다에 일부 돈이 흘러간 사우디 자선단체들의 사실상의 책임자.
압달라: 1982년 6월 황태자로 지명. 1963년부터 사우디 국가수비대 사령관을 맡고 있음.
나이프: 현 내무 장관.
한 마디로 지들끼리 다 해먹고 있다. 당연하다. 이들은 왕과 왕자들이니까.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왕족이 현재 3만명쯤 된다 한다. 그들 모두에게 왕족수당이 지급된다. 다들 놀고먹는다는 뜻이다. 아니 일을 하기는 한다. 그중 교미하고 번식하는 일이 주된 일이며, 그 밖에 평민들 등쳐먹는 일, 요트 타고 놀러 다니는 일, 쇼핑하는 일 등을 한다.
평민들 등은 이런 식으로 친다 한다. 어느 날 어느 왕족이 어느 레스토랑에 갔더니 장사가 너무 잘 되서 배가 아프다. 왕족은 주인을 불러 레스토랑을 자기한테 팔라며 수표를 끊어준다. 시세보다 턱 없이 싼 금액에. 그걸로 끝이란다. 대명천지에 백주대낮에 세상에 그러는 법이 어딨냐고 감히 대들다간 그 평민, 큰 코 다친다. 평생 감옥에서 썩을 수도 있고 기분 나쁘면 참수될 수도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공개 참수형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나라”이며 사우디 여권에는 “소지자가 ‘왕족의 소유물 belongs to the royal family’이라고 쓰여 있”다.
아, 그러나 이런 건 지엽적이고, 사소한 일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의 최대의 무기수입국이다. (역으로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최대의 석유수입국이다.) 미사일도사고 미그 15기도 사고 공중조기경보기도(AWACS)도 샀다. 저런 거 사려면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하다. 걱정하지 마라. 사우디아라비아는 어마어마한 돈이 있다. 세계최대의 석유매장량이 그것이다. 누군 땅 파서 장사하는 줄 아느냐는 말이 있지만 세상엔 정말 땅 파서 장사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이게 중요한데, 모든 거래에는 리베이트, 커미션, 알선수수료, 중개료, 소개료 등이 필요하다. 이 책의 요점은 이거다. 이런 돈이 빈 라덴에게 흘러들어간 돈이고, 이런 돈이 CIA가 파키스탄 정보국을 통해서 아프카니스탄의 탈리반에게 보냈던 돈이고, 이런 돈이 세계 최강국의 심장부 워싱턴으로 흘러들어가는 돈이다. 이런 돈이 세계를 움직이는 돈이다. 이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돈이다.
언젠가 어디선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썩을 일만 남아 있는 늙은 호박”이란 구절을 본 기억이 있는데 저자에 의하면 사우디아라비아가 그렇다. 그는 “사원과 길거리에서 느낄 수 있는 분노를 보라”고 말한다. 그 분노를 느끼는 평민들이 혹은 그 아들들이 “무슬림 형제단”의 일원이 되고 아프카니스탄 등지에 빈 라덴에게 가서 훈련을 받고 세계무역센타에 돌진했던 것이다. 납치범 가운데 15명이 사우디 출신이었다.
저자는 전직 CIA요원이라 한다. 저자의 시각은 철저하게 국수주의적이다. 사우디가 망하면 미국도 망하니 그렇게 되기 전에 사우디를 어떻게 좀 하자는 것이다. 그가 제안하는 처방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가 모델로 삼는 것은 “법의 지배”가 가능한 ‘시리아’다. “시리아는 20년 전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였다.” 1970년 ‘아사드’가 군사 구테타로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2000년 6월 20일 “70세의 나이에 잠을 자다가 편안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재임기간 30년 동안 국가가 안정되었다는 것이다.
근데 그 안정이란 게 웃긴다. 1980년 6월 25일 무슬림 형제단원들이 아사드를 암살하려고 했다. “얼마나 아슬아슬했는지는 모르지만 아사드가 열을 받을 만큼은 위험했던 모양이다.” 다음날 아사드는 헬리콥터에 2개 중대를 태워서 무슬림 형제단원들이 갇혀있던 악명 높은 교도소를 돌진해가 이 감방 저 감방 돌아다니며 수감자되어 있던 5천명에 가까운 형제단원들을 학살했다. 이런 거만 빼면 아사드는 법대로 했다는 것이다.
책을 다 읽고나니 머리가 복잡하다. 우리나라는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 것일까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