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과학이 내건 슬로건은 다음과 같다. 기표와 기의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질서를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의미작용에 저항하는 저항선에 의해 처음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의미는 어떤 특정한 기표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표들의 연쇄 속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사실이다. 의미화 작용을 대신할 만한 어떤 초월적 기표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기의가 끊임없이 기표 아래로 미끄러져 갈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기의는 미끄러진다. 기의가 미끄러진다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기의 따위는 그만 포기하고, 오오 미련을 버리고, 기표들의 연쇄작용에나 ─ 의미를 만드는 것은 이것이므로 ─ 신경쓰라는 건지. 처음부터 아예 뭐든지 의미하려 들지 말라는 건지. 아니면 에라 모르겠다 기왕 미끄러질 거 열심히 미끄러지겠다, 라는 심정으로 의미할 수 없음을 절망하라는 건지.
그러나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너나 나나 결국 미끄러질 수 밖에 없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