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멋대로 사진찍기

김윤기 (글, 사진), <<내 멋대로 사진찍기>>, 들녘, 2004

내 멋대로 사진을 찍는다하여 아무렇게나 찍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렇게 찍는다는 거다.

“달리는 말을 사진으로 찍는다고 가정해보자. 말이 달리는 동작은 유연한 연속적인 형태의 흐름이지만 그 가운데 유달리 멋진 자세들이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AF 기능이 있는 카메라에 모터 드라이브를 달고 ‘주르륵’ 여러 장을 찍은 뒤에 그중에서 잘된 것을 고르는 것이 쉬운 방법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매뉴얼 포커스(Manual Focus, MF) 카메라로 못할 것이 없다. 내 경우엔 이런 식으로 찍는다. 우선 말에 대해 잘 아는 사람에게 어떤 순간에 말이 가장 아름다운지 설명을 듣는다. 그러고 나서 말이 달리는 모습을 관찰하며 그 리듬을 익힌다. 그 다음 가장 좋은 배경을 찾고 거기에 말이 달려 들어올 때 말의 크기가 화면에서 얼마나 차지할지 고려한다. 그 거리나 위치를 잘 보고 나서 프레임을 결정해 놓고 기다린다. 그리고 달리는 말이 그 위치에 들어올 때 셔터를 누른다.”

이 책에서 사용된 의미 그대로 세 개의 단어를 기억하기로 했다.

집중력: “대부분 달랑 한 장만 찍고 만다. 여러 장을 찍는다는 것은 그만큼 집중력을 분산시키기 때문이다. ……몇 장 찍고 새로 좋은 각도가 보여서 더 찍는다면, 처음부터 자세히 보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집요하게: “나는 거리를 맞추는데 무척 신경을 쓴다. 집요하게 맞추는 편이다.”

기다리다:“쫓아서 찍는 것이 아니고 기다려서 찍는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든 난사(亂射)하지 말 것.

모랫말 아이들

황석영(지음), 김세현(그림), <<모랫말 아이들>>, 문학동네, 2001(1쇄), 2002(6쇄)

대학 때 후배 하나는 기억력이 아주 뛰어났다. 가령 한 여자와 처음 만난 날, 마지막으로 만난 날, 두 번째 만난 날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의 색깔, 손에 들고 있던 책, 세 번째 만난 날의 요일, 같이 놀러간 장소와 본 영화, 삼일절에 둘이 같이 놀러갔던 곳과 그곳의 카페의 이름과 그 카페에서 마셨던 음료 등등을 그는 속속들이 기억했다. 나는 그에게 소설을 한번 써보라고 말해주었다.

작가는 무엇보다도 기억하는 자이다. 이 책은 작가의 기억속의 모랫말 풍경이다. 모랫말은 지금의 영등포 어디쯤인 모양. 황석영은 책 말미의 작가의 말에서 “삽화를 맡은 분의 그림을 보면서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그의 기억을 재생하기에는 텍스트가 이미지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지음), 윤선아(옮김),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현암사, 1997

포스코센터와 같은 이름 있는 건물에서 일을 할 때의 장점은 ‘좋은 건물에서 일하니 다니는 회사도 좋겠고 월급도 많이 받겠다’는 식의, 말하자면 ‘있어 보이는’ 이미지의 효과도 있겠으나 그런 거 말고도 당장 ‘퀵서비스’를 이용할 때 편리하다. 어디라고 설명할 필요가 전혀 없으니 오토바이맨과의 소통이 쉽다. 반면에 지금 있는 사무실의 위치를 설명하려면 아주 구차해진다. “신촌기차역 아세요?”로 시작하거나 아니면 “이대역에서 신촌역 방향으로 가다가 첫 번째 나오는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해서는 ~” 대개는 근처에서 와서 다시 전화를 걸어온다. “예, 거기 따위넷(가명)이라고 적혀있는 오렌지색 간판보이세요? 예, 그 옆에 작은 골목이 하나 있는 데요, 그 안으로 한 50미터쯤 들어오시면~” 또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해주어야 한다. 한두 번도 아니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통화가 이루어진다. 이게 다 무명의 설움이다. 이렇게 존재의 위치는 이미 알려져 있는 것과의 관계에 의해서 규정된다.

이건 비단 지리적 위치의 문제만은 아니다. ‘내가 누구인가’하는 실존적 물음에 대한 답도 그러하다. 딸아이의 유치원에 가서 내가 누구인지 밝힐 적에는 딴소리 다 필요 없고 오직 하나 ‘나우 아빠’라는 말이면 된다. 혹시 내가 살아생전이든 죽어사후든 아주 유명해진다면 나우에게는 ‘따위의 딸’이라는 라떼르가 따라다닐 수도 있겠지만, 행여나 이제나 저제나 그럴 일은 거의 없어 보이니 이제는 그나마 ‘나우 아빠’ 소리라도 제대로 듣기 위해서 딸 뒷바라지나 열심히 하는 게 맞는 거 같다. 이쯤 하고.

이 책의 주인공은 파울 비트겐슈타인인데 모르는 이름이다. 해서 이 사람이 누군지 알려면 ‘이 사람과 관계가 있는 이미 알려진 어떤 존재’가 필요하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아는 이름이다. 유명한 철학자다.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여야 한다.” “한 단어의 의미는 언어 속에서의 사용이다.” “철학은 병 속에 든 파리를 병 밖으로 꺼내주는 것” 등의 말을 했다.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다. 이제 됐다.

이 책의 지은이는 토마스 베른하르트인데 역시 모르는 이름이다. 누구인지 밝혀보자.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인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둘도 없는 친구’이다. 이제 됐다. 이 책은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기록한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삶과 둘 사이의 우정에 대한 기록, 즉 “메모”이다. 소설이 아니다.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삶. 극적이고 비극적이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비트겐슈타인家門에서 이른바 ‘로얄 패밀리’의 한 사람으로 태어나 저 가진 거 다 남을 주어버리고 “더는 가난해 질수 없을 정도로 무일푼이” 되었고, 정신병원을 제집 드나들 듯하며 평생을 살았다.

광기. 중요한 건 이거다.

그는 먼저 “입석표를 사서라도 날마다 즐겨 오페라를 관람하러 가던 오페라광이었다. 죽을 만큼 아프던 그가 여섯 시간이나 걸리는 트리스탄 공연을 끝까지 서서 보았고, 공연히 끝난 후에도 큰 소리로 브라보를 외치거나 야유의 휘파람을 불 힘이 남아 있었다. 링가도에 있는 오페라 하우스에서 관람한 사람 중에서 그만큼 크게 브라보를 외치거나 야유의 휘파람을 분 사람은 그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그가 “맨 먼저 브라보를 외치거나 아니면 휘파람으로 야유”를 하느냐에 따라서 그 오페라의 흥행이 좌우되었다. “그러나 어떤 오페라 공연이 그의 맘에 들고 어떤 것이 맘에 들지 않는지는 객관성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단지 그의 기분과 변덕 그리고 광기가 그것을 결정했다.”

“우리가 아는 모든 미친 철학자의 머리도 결국에는 정신력을 빠른 속도로 내던지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에 폭발한 것이다. 그들의 정신력은 끊임없이 (그들 머리의) 창밖으로 내던지는 정신력의 속도보다 훨씬 빠르고 잔인한 속도로 생겨나며, 어느 날 그들의 머리는 폭발하게 되고 그들은 죽어 버린다. 파울 역시 어느 날 그렇게 폭발했고, 죽었다.” 그러니 미치지 않기 위해서는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부지런히 머리의 창밖으로 던져버려야 한다. 어쩌면 술 먹고 중얼거리는 사람들도 미치지 않기 위한 안간힘으로 그렇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술 먹고 제흥에 겨워 뭐라뭐라 중얼거리면 이렇게 좋게 봐주라. 전혀 좋게 봐줄 게 아니라고 그저 고약한 술버릇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날 때부터 삐딱한 사람은 지금 당장 아무 처세서나 들쳐보라.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라고 나와 있다. 아무렴. 또 이쯤하고.

저런 광기가 나타나는 모습은 다양하다. “우리 둘에게는 …… 또 하나의 광기가 있었는데 그건 이른바 세는 병이었다. ……. 예를 들어 나[작가]는 …… 전차를 타고 시내로 들어갈 때면 창밖을 내다보며 건물 유리창 사이의 방, 유리창이나 문 혹은 문 사이의 방 수를 세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그리고 전차가 빨리 달리면 달릴수록 그만큼 더 빨리 세야 한다. 거의 미쳐 버릴 때까지 세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전차를 타고 빈이나 다른 도시를 돌아다닐 때 세는 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창 밖을 내다보지 않고 눈길을 바닥 쪽으로 돌리는 습관을 들였다.” 파울의 세는 병은 이보다 정도가 훨씬 심했다. 파울은 또한 “보도블록을 남들처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내디디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정확하게 규정된 체계에 따라 내디디는 습관이 있었는데…….그러니까 예를 들어 정확하게 보도블록 두 개를 완전히 지나서 세 번째 보도블록에서 발을 내디디되 그냥 생각 없이 보도블록 한가운데 발을 내디디는 것이 아니라 보도블록 맨 아래쪽이나 아니면 맨 위쪽에 정확하게 발을 내디뎌야 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인생이 피곤하다 아니할 수 없다.

광기에 가득 찬 삶은 결국은 이렇게 되는 건가. “……제대로 된 대화 역시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아무리 들어도 앞뒤 맥락이 맞지 않은 끊어진 문장을 나열하며 말했다.” 이쯤 되면 아니 할 말로 “미쳐도 곱게 미치지”는 못한 셈이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존 내시는 특이한 경우이다. 그는 자신에게 노벨상 수상 소식을 전하러 온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미쳤어요.I am crazy.” 미친 자가 스스로 미쳤다고 말하는 이 장면은 아이러니 하다. 크레타 섬의 모든 주민은 다 거짓말 장이라는 역설이 생각난다.

존 내시가 미친 상태에서 미치지 않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취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건 선택하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실재하지 않는 것을 보지만(but I still see things that are not here.) 그는 그것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을 선택한다.(I just choose not to acknowledge them.) 이 선택이란 일종의 마음의 다이어트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like a diet of the mind.) 그의 정신의 입맛을 돋구는 최대의 식욕(욕망)은 패턴이다.(like my appetite for patterns).

정리하자면 그는 자신이 패턴에 대한 욕망에 탐닉하면 미친다는 걸 의식하고 있는, 하여 미치지 않기를 선택 ─ 선택, 이제 중요한 건 광기가 아니다. 선택이다. ─ 할 수 있는, 참으로 곱게 미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본인이야 어쩌면 미친 사람보다 더 힘들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미친 자는 스스로가 미쳤다는 의식이 없고, 미칠 것만 같은,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미치지 못한 자는 미친 자를 안타까워하거나 혹시는 부러워할 뿐이다. 팝송 ‘빈센트’의 가사가 생각난다. 그들은 여전히 ‘듣지’ 않고 어쩌면 영원히 ‘듣지’ 않을 것이라는……

And now I think I know
What you tried to say to me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And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re not listening still
perhaps they never will

사족 하나:
토마스 베른하르트를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친구로서만 기억하는 건 그에 대한 제대로 된 자리매김은 아닐 것이다. 소설 “혼란(1967)” “바텐(1969)” “옛 거장들(1985)” “한 아이(1982)”, 희곡 “사냥 클럽(1974)”, 시집 “이 세상과 지옥에서(1957)” 등의 작가로 기억하는 것이 올바른 길일 터인데……문제는 저 작품들을 내가 어느 세월에 읽어보겠느냐는 것이다. 어쩌면 소설 제목에 ‘비트겐슈타인’이 들어간다는 이유만으로 이 책을 집어든 것이 잘못일런지도 모른다.

사족 둘: 본문은 9페이지에서 시작해서 136페이지에서 끝나는 데, 본문전체가 단 하나의 파라그래프로 이루어져있다.

Jean Grenier, 함유선 옮김,<<섬 Les Iles>>, 청.하, 1988(1쇄) 1997(17쇄)
장 그르니에, 김화영 옮김, <<섬 Les Iles>>, 민음사, 1997(1쇄) 2003(15쇄)

섬, 언제 들어도 참말로 거시기한 말이다. 이 말이 주는 고립과 격리의 이미지는 한편으로는 매력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곤혹스럽다. 내가 섬인 건 참을 수도 있고 때로는 호젓한 게 즐겁기까지 한데, 다른 사람이 자기 만의 섬으로 기어들어가서는 두문불출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이딴 소리나 하고 자빠져 있으면 그 자를 당장 그 섬에서 끄집어내어 사람들 사이에 쳐박아두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내가 섬에 들어가는 건 자발적인 유배니 내가 나올 때까지 날 꺼낼 생각 같은 건 아예 하덜덜덜 말라. 그러나 니가 섬에 들어가겠다는 건 현실도피이니, 더구나 이 부박한 삶이 피한다고 살아지는 게 아니니 까불지 말고 그냥 여기서 사람들과 살부비며 부대끼며 아둥바둥 살아라. 그러다 보면 좋은 날도 오겠지.” 뭐, 내보기에 이런 식의 도둑놈 심보가 다들 조금씩은 있는 거 같다. 당신이라도 없으면 다행이고.

쳇,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고? 그 섬에 가고 싶다고? 내 살아보니 사람들 사이에 섬 같은 건 없다. 사람들 사이에 있는 건 바다다. 불통과 욕망과 절망의 바다가 사람 환장하게 출렁거릴 뿐.

섬. 나에게 장 그르니에의 <<섬>>이 두 권있다. 선물받은 거 아니다. 두 권 다 내 발로 서점까지 걸어가 내 손으로 집어 들고 내 돈 내고 산 내 책이다. 하나 달라고? 택도 없는 소리!

첫 번째 ‘섬’은 88년 8월 20일에 1쇄를 찍고 97년 8월 11일에 17쇄를 찍은, 함유선이 옮긴 청.하 출판사 版 ‘섬’이다. 이 책의 책갈피에서 뒷면에 ‘피로연 장소, 신혼여행지’ 따위의 글자가 적혀있는 파란색 ‘경복궁 출장피로연 메뉴 전단지’가 나왔으니 결혼 즈음에 들고 다녔었나 보다. 솔직히 이거 읽다가 말았다. 지루해서. 나는 잘 안읽히는 이유를 번역의 문제라고 치부해버렸다.

두 번째 ‘섬’은 97년 8월 30일 1쇄를 찍고 2003년 11월 20일에 15쇄를 찍은, 김화영이 옮긴 민음사 版 ‘섬’이다. 번역자가 다르니 읽힐까 싶어서였고, 때마침 섬으로 휴가도 가게 된 참이라 가서 읽으리라 했다. 늘 그렇듯 여행가서는 들춰보지도 못했다. 아무려나 두번째 섬도 잘 안읽히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김화영의 번역을 높게 사는 듯 하지만 두 권을 놓고 비교해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내 보기에는 함유선의 번역이 좀 더 시적인 반면에 문장이 호흡이 좀 거칠고, 김화영의 것은 문장이 부드러운 반면 맛은 좀 덜하다고나 할까. 어느 게 더 나은지는 모르겠다. 불어로 된 원서를 읽을 능력이 없으니 아마 영원히 모를 것이다.

까뮈는 이 책에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 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김화영 역)”고 했으나 ─ 같은 문장을 함유선은 이렇게 옮겼다. “오늘 처음으로 이 책을 열어 보게 되는 저 알지 못하는 젊은 사람을 너무나도 열렬히 부러워한다.” ─ 난 아무래도 까뮈가 부러워할 만한 독자는 못 될 모양이다. 여전히 하품난다. 좀 더 늙어서 보자.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지음), 이윤기(옮김), <<그리스인 조르바 Zorba the Greek>>, 열린책들, 2004

유명한 책이라는 데 난 여태 뭐하고 살았는지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안소니 퀸 주연으로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한다. 줄거리를 요약하지는 않으련다.

조르바는 ‘나’를 ‘두목’이라고 부른다. 조르바가 보기에 ‘나’는 “쓰레기 같은 책만 잔뜩 집어넣어 놓은 머리”를 가진 사람이다. 한마디로 책상물림이란 뜻이다. 이 책은 그런‘내’가 기록한 조르바의 어록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조르바가 주둥이 열어 하는 말마다 어쩜 그렇게 쿨한지…… 쿨한 말 몇 개만 옮긴다. 전후 맥락을 잘라내고 적는 것이니 뜻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

“조르바 씨, 이야기는 끝났어요. 나와 같이 갑시다. 마침 크레타엔 내 갈탄광이 있어요. 당신은 인부들을 감독하면 될 겁니다. 밤이면 모래 위에 다리를 뻗고 앉아 먹고 마십시다. 내겐 계집도 새끼도 강아지도 없어요. 그러다가 심드렁해지면 당신은 산투리도 치고…….”
“기분 내키면 치겠지요. 내 말 듣고 있소? 마음 내키면 말이오. 당신이 바라는 만큼 일해 주겠소. 거기 가면 나는 당신 사람이니까. 하지만 산투리 말인데, 그건 달라요. 산투리는 짐승이오. 짐승에겐 자유가 있어야 해요. 제임베키코(소아시아 해안지방에 거주하는 제임백 족의 춤), 하사피코(백정의 춤), 펜토잘리(크레타 戰士의 춤)도 출 수 있소. 그러나 처음부터 분명히 말해 놓겠는데, 마음이 내켜야 해요.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내’가 보는 조르바의 모습은 이렇다.
“……조르바는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고 그 머리는 지식의 세례를 받은 일이 없다. 하지만 그는 만고풍상을 다 겪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 마음은 열려 있고 가슴은 원시적인 배짱으로 고스란히 잔뜩 부풀어 있다. 우리가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조르바는 칼로 자르듯,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오스의 매듭을 자르듯이 풀어낸다. 온몸의 체중을 실어 두 발로 대지를 밟고 있는 이 조르바의 겨냥이 빛나갈 리 없다. 아프리카 인들이 왜 뱀을 섬기는가? 뱀이 온몸을 땅에 붙이고 있어서 대지의 비밀을 더 잘 알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 뱀은 배로, 꼬리로, 그리고 머리로 대지의 비밀을 이해한다. 뱀은 늘 어머니 대지와 접촉하고 동거한다. 조르바의 경우도 이와 같다. 우리들 교육받은 자들이 오히려 공중을 나는 새들처럼 골이 빈 것들일 뿐……”

“두목, 사람들 좀 그대로 놔둬요. 그 사람들 눈 뜨게 해주려고 하지 말이요! 그래, 뜨였다고 칩시다. 뭘 보겠어요? 비참해요! 두목, 눈 감은 놈은 감은대로 놔둬요. 꿈꾸게 내버려두란 말이에요……

조르바, 말에 거침이 없다. 그 거침없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때 그는 춤을 춘다. 그것도 아주 결사적으로 춘다. “그의 늙은 육신이 그 난폭한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공중에서 수천조각으로 찢어져 바람에 사방으로 날릴 것만 같아 두려”울 지경으로 춘다. 이쯤 되면 발악이다.

그가 이따금 이렇게 격렬하게 춤을 추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다. “나라는 놈은 원래 이렇게 생겨 먹었어요. 내 속에는 소리치는 악마가 한 마리 있어서 나는 그놈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감정이 목구멍까지 올라올 때면 이놈이 소리칩니다. <춤춰!> 그러면 나는 춤을 춥니다. 그러면 숨통이 좀 뚫리지요.[……]하지만 춤을 추지 않았더라면 정말 미치고 말았을 겁니다. [……] 두목, 이제 내 말 이해할 수 있겠지요? 젠장, 아니라면 내가 혼잣말을 하고 있는 건가?

조르바에게 춤이란 말로써 말할 수 없을 때 몸으로 말하는 행위인 셈이다. 하긴 누구나 그런 때가 있는 법이다. 미친 듯이, 미친 듯이 흔들어대고 싶을 때가. 어디 광란의 춤판 벌어진데 없나?

이런 ‘인간’의 삶에 여자가 빠지면 섭섭하다. 그의 연애관:
여자는 맑은 샘물과 같습니다. 거기 들여다 보면 모습이 비칩니다. 마시면 되는 겁니다. 뼈마디가 녹신녹신할 때까지 마시면 됩니다. 이윽고 목이 마른, 다음 사람이 옵니다. 그 사람도 자기 모습을 들여자 보며 마시면 되는 겁니다. 세 번째 사내가 오겠지요……”

이 ‘인간’ 지가 결혼 몇 번 했었는지도 모른다. “몇 번 했느냐고요? 정직하게 말하면 한 번 …… 한 번이면 되는 거 아니오? 반쯤만 정직하게 말하면 두 번…… 비양심적으로 치자면 천 번, 2천 번, 3천 번쯤 될 거요. 몇 번 했는지 그걸 다 어떻게 계산합니까?” “수탉이 장부를 가지고 다니며 한답니까?” 그야말로 허걱. 이다.

“두목, 당신은 젊어요. 당신은 아직 젊어서 몰라요. 나처럼 머리꼭지가 허옇게 세면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합시다. 이 영원한 사업 문제를.”
“무엇이 영원한 사업인가요?”
“그야 물론 여자지요!
여자가 영원한 사업이란 이야기는 대체 몇 번이나 해야 합니까? 현재의 당신은 양 꼬리가 두 번 까딱거릴 시간에 암탉을 찍어 누르고는 가슴을 턱 펴고 똥 더미 위에 올라가 뻐기며 한바탕 우는 수탉과 다름없어요. 암탉은 보지 않아요. 볏만 봅니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걸 알 턱이 없지. 악마나 물어갈 일이지!”

다음은 내가 가장 통쾌하게 여겼던 말:
“두목, 내 생각을 말씀드리겠는데, 부디 화는 내지 마시오. 당신 책을 한 무더기 쌓아 놓고 불이나 확 싸질러 버리쇼. 그러고 나면 누가 압니까. 당신이 바보를 면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