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축지법

송치복 지음, <<생각의 축지법: 광고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디자인하우스, 2003

노무현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대선 광고를 만들었다는 카피라이터가 쓴 책. 볼 거 거의 없음. 천지인에, 상통일맥에… 도사연 하는 태도 무지 마음에 안 듬. 말 끝마다 박우덕 사장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함. 이거 무지 비위 상함. 광고쟁이가 청와대 미디어 홍보 비서관하는 거 또 무지 맘에 안듬. 일생의 자랑이 “천연 암반수로 만든 맥주”가 될 가능성이 높음. 돈 주고 사서 읽은 거 아님. 사무실에 굴러다니기에 슬렁슬렁 넘겨 본 것임. 만2천원이면 무지 비쌈.

2003년 5월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 하고 서명된 서문 있음. 대통령 참 한가함. 이딴 책 서문이나 쓰고(직접 썼을까? 아니면 명의만 빌려준 걸까?)

포스트 스크립트 삼아 걸식이님에게:
“9-2. ‘원하는 걸 얻으려면 꼬셔야 한다. 꼬시려면 알아야 한다. 알려면 사랑해야 한다.’ 어느 플레이보이의 좌우명입니다.”(p149)

소립자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소립자 Les Particules élémentaires>>, 열린 책들, 2003

브뤼노와 미셸은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버지가 서로 다른 형제다. 누구나 그렇듯 이들도 각자의 세계에서 각자의 생을 산다. 먼저 학교 선생님인 브뤼노의 세계를 보자.

“그[브뤼노]는 카프카가 그리고 있는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수치심으로 얼룩진 그 슬로 모션의 세계, 존재와 존재가 별들 사이의 텅 빈 공간만큼이나 막막하고 허허로운 공간에서 마주치기만 할 뿐 그들 사이에 어떤 관계도 맺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세계, 그것은 바로 브뤼노의 정신 세계였다. 이 세계는 느리고 차가웠다. 그래도 따뜻한 것이 있기는 했다. 여자들의 두 다리 사이에 있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이쯤 되면 이 인간, 바로 견적 나온다. 한 마디로 그는 섹스를 간절하게, 간절하게 원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는 찬밥 신세다. 하는 짓도 꼭 변태 짓이다. 가령,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여학생의 허벅지를 만지고 그 앞에서 물건을 꺼내 수음을 하기도 한다. 그가 이렇게 된 데에는 물론 사연이 있다. 자식 나놓고 나 몰라라 하며 자신의 인생만을 즐긴 어머니, 기숙사에서 동료학생들에게 당한 폭력 등이 그것이다.

그러다가 브뤼노는 가까스로 한 여자를 만난다. 드디어 차가운 세계를 벗어나 따뜻한 “거기”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섹스에 탐닉한다. 그야말로 아주 징허게 한다. 묘사도 징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하반신 마비가 되어버린 여자가 먼저 자살해 버린 탓이다. 한편 그에게는 전처와 살고 있는 아들이 있다. 브뤼노는 아이의 학교 앞에 가서 먼발치에서 아이들 바라본다.

이 부분에 찡한 구절이 하나 있다. ” 저 애는 내가 없어서 고통을 받았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그런 내색을 한 적이 없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건설해 놓은 세계를 잘 견뎌 낸다. 아이들은 최선을 다해 그 세계에 적응하려고 애쓴다. 훗날 그들은 대개 그 세계를 답습한다.”

이제 “그는 자기 삶이 끝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끝나 버린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어둡고 고통스럽고 모호했다.” 그길로 그는 다시 언젠가 머물렀던 정신병원에 찾아간다. “나 다시 왔소.”

반면에 DNA를 연구하는 생물학자인 미셸은 “간명하고 사건이 별로 없는 세계”에 살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게 그의 관심사다.

“인간의 뇌 내부에서 뉴런과 시냅스 사이에 전자가 교환되는 것은 원자 수준의 아주 미묘한 현상이다. 이 현상은 원칙적으로 말해서 양자 역학에서 말하는 불확정성의 원리의 지배를 받는다. 하지만 대다수의 뉴런은 작은 차이들을 통계적으로 무효화시킴으로써 인간의 행동에 결정론적인 성격을 부여한다. 그래서 인간의 행동은 다른 모든 자연계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틀을 벗어나지 않게 된다.”

물론 미셸에게도 사랑이 있었다. 그러나 형과는 달리 그에게 “사랑은 작은 위안은 되겠지만, 그것도 희망이 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성격은 담백하다. 이런 식이다. “미셸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겪어야 할 일이라면 그냥 겪으리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중간은 냅두고 결론:

“그는 자기 연구에 꼭 필요한 시간만 견뎌”내고 연구를 마치고 실종되었다. 그 “연구”란 “인류는 사라지고 인류 대신 새로운 종이 생겨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구? 새로운 종이 생겼다.

그럼 인류는? 멸종!

끝으로 인상 깊은 구절 하나: “자아란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신경증이다.”

중간 예술 UN ART MOYEN

피에르 부르디외 外, 주형일 옮김, <<중간 예술 UN ART MOYEN >>, 현실문화연구, 2004

이 책은 ‘사진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 보고서’다. ‘사진에 대하여’는 너무 막연하니 구체적으로 열거하자면 ‘사진 행위’와 사회계급의 관계라든가 사진 클럽, 저널리즘 사진, 광고 사진, 예술 사진, 직업으로서의 사진사, 정신분석과 사진 등이 주요 테마다.

어렵다.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거기다가 엄청 두껍다. (역자후기와 찾아보기까지 포함하여 510페이지다.) 1964년에 이런 연구보고서가 쓰여졌다는 게 40년 뒤에 읽는 나로서는 참 놀랍다. 이 보고서는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분석하면서 쓰여졌다. 한 마디로 ‘사진의 사회적 의미’를 탐구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체계적으로 요약정리할 엄두가 안난다. 그냥 읽다가 줄 친 몇개의 구절을 쓰고 땡쳐야 겠다. 그것도 전체가 아니라 <서문>중에서만.

먼저 아비투스:
“객관적 규칙성들의 체계와 직접적으로 관찰 가능한 행동들의 체계사이에는 항상, 다름 아닌 아비투스라는 매개체가 있다. 아비투스는 결정론과 결정, 계산 가능한 가능성들과 체험된 희망들, 객관적 미래와 주관적 계획의 기하학적 장소다. 그래서 체계적이거나 정신적인 성향들의 체계, 혹은 사고 · 지각 · 행동의 무의식적 스키마들의 체계라는 의미를 갖는 계급의 아비투스는,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의 창조와 자유로운 즉흥 작업에 대한 ‘충분히 근거 있는 환상’ 속에서 객관적 규칙성들에 부합하는 모든 사고 · 지각 · 행동들을 행위주체들이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p22)

“그렇지만 이미지의 생산이 완전히 카메라의 자동성에 귀속될 때조차도, 촬영은 여전히 미학적이고 윤리적인 가치들을 갖는 선택행위다”(p23)

“…객관적이고 공통적인 규칙성들의 내면화인 ‘에토스’를 매개로 집단은 이 행위를 집단적 규칙에 종속시킨다. 그래서 하찮은 사진이라도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의 명백한 의도들 외에도 집단 전체에 공통된 지각 · 사고 · 평가의 스키마들의 체계를 표명한다.”(p23) 즉 아비투스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사정이 이러하니 “한 장의 사진을 적절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 사진이 한 시대의, 한 계급의, 또는 한 예술 집단의 상징체계에 속한다는 점에서 사진이 ‘드러내는’ 잉여 의미를 해독하는 것이다.”(p24)

책을 읽다가 발견한 흥미로운 격언 하나:
“취향과 색깔에 관해서는 논쟁하지 않는다.”(p98)

GO

가네시로 가즈키, 김난주 옮김, <<GO>>, 현대문학북스, 2000

우선 재미있는 구절 두 개:
콧잔등에 군밤을 다섯 대 얻어맞았다. 즐거운 추억이 다섯 개 지워질 만큼 아팠다.(p74)

“혼자서 묵묵히 소설을 읽는 인간은 집회에 모인 백 명의 인간에 필적하는 힘을 갖고 있어.”(p79)

성장기 소년의 치기와 폭력과 문화와 페이소스와 사랑을 적당히 섞었다. 이 소설, 잘 나가다가 막판에 완전 깬다. 딱 만화다.

“그 남자의 움직임, 정말이지 얼마나 굉장했는지 몰라. 그 남자애 주변에만 중력이 없는 것 같았어, 전혀. 그 남자애, 자연의 법칙을 초월한 것 같았어.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코트에 있는 상대편 선수들이 하나 같이 코피를 흘리면서 바닥에 쓰러져 있었어.”

멋지다. 주인공이 농구하다가 상대 선수를 때려눕히는 장면이다. 이 정도면 싸움 하나는 정말 잘 한다. 그러니 이런 광경을 보고 뿅가는 일본 여자도 생긴다. 그냥 뿅가는 정도가 아니다. “거기가 젖어 있”을 정도로 뿅간다.

책날개에 있는 아버지가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느니 ‘일본사회에 내재한 민족차별의 극복’이니 하는 건 다 공허한 소리다. 그냥 싸움 잘하는 재일교포 3세가 어떻게 살았나 하는 얘기다. 중요한 건 “국적 따위”가 아니다. 연애다. 그러니 전혀 심각할 것도 없고, 특별히 감동 받을 것도 없다.

뒷 표지에 실린 찬사일색의 글들 중에서 아사히신문이 “마치 ‘재일문학’속의 <<호밀밭의 파수꾼>>과 같다.”고 했다는 데… 글쎄다. 아무래도 수준이 좀 그렇다.

“가자.”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 일어원전을 보지 않았으니 확실치는 않지만 이 ‘가자’가 소설의 제목인 ‘GO‘가 아닌가 싶다. — 가자니, 어디로? 어디긴. 자러 가야지. 날도 때마침 크리스마스이브다. 어쩌면 눈이 올지도 모른다. 아주 골고루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