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

릭 게고스키(지음), 차익종(옮김),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 2007, 르네상스

어떤 책에는 사연이 있다. 가령,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에는 김희선의 싸인이 묻어 있다. ae시절 cf 녹음실에서 당시 폼으로 들고 다니던 책에 직접 받는 것이다. 김희선, 얼굴은 예쁜데 싸인은 확 깼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이 책, 누구 원하는 사람 있으면 사가라. 이나영의 싸인이 묻어 있는 책이 있다면 교환도 가능하다. 덤으로 아내가 신혜성에게 받은, 역시나 그의 친필 싸인이 들어 있는 앨범을 몰래 꼬불쳐 얹어 줄 수도 있다. 아, 그 곱상한 외모와 노래에 비하면 신혜성의 싸인도 깨기는 마찬가지다. 자, 이게 다가 아니다. 문근영이 “따위넷 화팅”이라고 적어준 사진도 끼워 주겠다.

자, 여기 1992년 저자의 판매목록 16호가 있다. 이렇다.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의 시집 <<거상 The Colossus and Other Poems>>, 뉴욕, 1962년. 미국판 초판. 플라스의 헌사가 씌어 있음. ‘테드에게. 시 거상과 오토 왕자(Prince Otto)의 기법(craft and art)은 당신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실비아가.'” 이 책이 어떤 책인지 모르는 사람은 “책 수집가가 되긴 틀렸다.”

“버지니아 울프가 손으로 인쇄한” T. S. 엘리어트의 시집도 “아주 특별한 책”이며, 헤밍웨이, J. D. 샐린저, D. H. 로렌스, 등의 책도 이 책에서 말하는 “아주 특별한 책”이다. 이런 책에 얽힌 뒷담화를 읽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가령, 조앤 롤링의 경우를 보자.

“실업수당으로 연명하는 가난한 싱글맘 조앤 롤잉이 불기 하나 없는 냉기를 피하기 위해 동네 카페 한 곳에 자리를 잡고 갓난아기를 옆에 재우며 글을 썼다”는 등의 전설적인 “이야기에는 대체로 사실과 다를 부분이 많다.” 롤링은 “곤혹스러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다. “내 딸을 옆에 재우고 카페 여러 곳에서 글을 쓴 것은 사실이다. 이런 이야기에 무슨 낭만적 구석이 있다고 느끼는 분도 있겠지만, 실제로 겪으면 전혀 그렇지 않다. ‘냉기 뿐인 셋방’ 이야기는 완전히 그럴 듯하게 꾸며진 얘기이다. 따뜻한 곳을 찾아 헤맸다니, 그런 일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커피 맛이 좋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알아서 빈 잔을 채워주는 카페를 골라 다녔을 뿐이다.”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순탄하게 데뷔한 작가는 거의 없다는 것, 모두들 죽어라고 열심히 썼다는 것.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청춘의 문장들>>, 마음산책, 2007(1판 7쇄)

이 책은 어느 소설가가 권해서 읽게 되었다. 과연 읽을만 하였으나, 나의 청춘은 애저녁에 다 지나간 까닭에─덧 없어라─”작가의 젊은 날을 사로잡은 한 문장”이 요즈음의 내 구질구질한 나날들을 사로잡아 주지는 못했다.

아울러 내 청춘을 사로잡았던 것은 당시나 하이쿠 뭐 이런 문장들이 아니라 지리멸렬했던 단어들이었다는 것을, 묻는 이는 없어도 밝혀야겠다. 예를 들면 이런 말들; 간통, 농약, 유서, 수음, 소외, ( ), ( ), ( )…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나는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글을 쓸 수 있다.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1968년 프랑스에서 학생운동이 극에 달했던 시절, 바리케이드 안쪽에 씌어진 여러 낙서 중에 ‘Ten Days of Happiness’라는 글귀가 있었다고 한다. 열흘 동안의 행복. 그 정도면 족하다. 문학을 하는 이유로도, 살아가거나 사랑하는 이유로도.”

이런 산문집 말고 그의 소설을 읽어봐야겠다. 오늘 밤에도 남의 문장이 바람에 스치운다.

글짓기 시간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글, 알폰소 루아노 그림, 서애경 옮김, <<글짓기 시간>>, 아이세움, 2003(초판 1쇄), 2007(초판 11쇄)

군인이 학교에 찾아와서 아이들에게 글짓기를 시킨다. “여러분이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집에서 어른들이랑 무슨 일을 하는지 쓰란 말이다. 어떤 손님이 놀러 오는지, 어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텔레비전을 보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쓰란 말이다. 생각나는 대로 쓰면 된다. 자유롭게 써!”

아이의 부모는 밤마다 남몰래 라디오를 듣는다. 그건 군인들에게 잡혀갈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학교 담벼락에도 ‘독재 타도’라는 말이 적혀 있”는 시절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이렇게 쓴다. “엄마가 밥 먹자고 부르시면, 우리 식구는 식탁에 앉아 밥을 먹습니다. 나는 국만 빼고 뭐든지 참 잘 먹습니다. 저녁밥을 먹고 나면 엄마랑 아빠는 소파에 앉아 체스를 두시고 나는 숙제를 합니다. 내가 자러 들어갈 때까지도 엄마랑 아빠는 체스를 두십니다. 그 뒤로는 모릅니다. 왜냐하면 나는 자고 있으니까요.”

아이가 쓴 글을 읽은 아빠는 이렇게 말한다. “‘잘 썼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체스 판을 사 두어야겠구나.”

***
안토니오 스카르메타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쓴 작가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지음), 우석균(옮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2004(1편 1쇄), 2006(1편 8쇄)

네루다의 시집을 탐독한 마리오가 메타포를 무기로 동네 처녀 베아트리스를 꼬셨다. 이러하다. “그가 말하기를 제 미소가 얼굴에 나비처럼 번진대요.” 마리오는 또 이런 말도 했다. “그대 머리카락을 낱낱이 세어 하나하나 예찬하자면 시간이 모자라겠구려.” 하는 수작이 뻔하나 베아트리스는 마리오에게 넘어갔다. “마리오가 해준 말은 허공에서 사라지지 않았어요. 저는 외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할 때도 그 생각을 할 거예요.”

과년한 처녀를 둔 과부는 기가 막히다. “더 이상 말할 것 없어. 우리는 아주 위험한 상황과 맞닥뜨렸어. 처음에 말로 집적대는 남자들은 다들 나중에 손으로 한술 더 뜨는 법이야.” 그러고는 딸에게 당장 가방을 싸란다. 잠시 떠나 있으라는 것이다. 베아트리스는 “악다구니를 썼다.”

“‘기막혀! 남자애 하나가 내 미소가 얼굴에서 나비처럼 날개짓한다 그랬다고 산티아고에 가야 되다니.’
과부 역시 열을 올렸다.
‘닭대가리 같으니! 지금은 네 미소가 한 마리 나비겠지. 하지만 내일은 네 젖통이 어루만지고 싶은 두 마리 비둘기가 될 거고, 네 젖꼭지는 물오른 머루 두 알, 혀는 신들의 포근한 양탄자, 엉덩짝은 범선 돛, 그리고 지금 네 사타구니 사이에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는 고것은 사내들의 그 잘난 쇠몽둥이를 달구는 흑옥 화로가 될걸! 퍼질러 잠이나 자!'” 대단한 과부다.

아이들에게 오늘의 은유를 가르칠 때 교과서로 삼기에 딱 좋은 책인데 내용이 야해서 저어된다. 그밖에 영화 <일 포스티노>의 원작이라는 것, 영화와 책의 내용이 조금 다르다는 것, 경쾌하게 읽히나 내용은 짠하다는 것,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는 것을 적어 둔다.

저 위의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나봐

커트 보네것(지음), 노종혁(옮김), <<저 위의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나봐>>, 새와 물고기, 1994

웃자고 보면 웃기는 책이다. 좋게 말해서 재기발랄한 유머─이런 유머를 블랙 유머라고 하는 모양이다─가 있고 나쁘게 말해서 황당무계하다. 농담의 백미는 이렇다.

“지구시간으로 기원전 203,117년, 세일로는 기계상의 문제로 태양계에 착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주선 동력장치에 있는 지구의 깡통따개 크기 정도의 작은 부속품이 완전히 망가지는 바람에 착륙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세일로는 타이탄에 임시로 숙소를 정하고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트랄화마도르에 알렸다. 그는 빛의 속도로 메시지를 보냈는데, 이는 트랄화마도르에 도착하는 데 지구시간으로 150,000년이 소요될 것이었다.”

“회신은 현재 영국에 있는 한 평야에 커다란 돌로 씌어 있었다. 이 회신의 잔재는 아직도 서 있고, 스톤헤인지라고 알려져 있다. 위에서 본 스톤헤인지의 의미는, 트랄화마도르 언어로는 이러했다 : ‘교체부품이 가능한 한 최고의 속도로 가고 있음.’
세일로가 받은 메시지가 스톤헤인지뿐인 것은 아니었다.
지구에 씌여진 것은 모두 네 개였다.
중국의 만리장성은 위에서 보면 트랄화마도르 언어로 이러햇다 : ‘조금 참을 것, 자네를 잊지 않고 있음.'”

잘라 말해서, 지구의 역사란 어느 행성에서 특별 임무를 주어 우주 반대편으로 파견했던 사일로(라는 기계)에게 고장난 우주선 수리에 쓸 쇠조각 하나를 전달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는 거다. 그 임무란 알고 보니 안녕하슈?, 하고 안부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지금 장난하냐? 소리가 절로 난다. 허무하고 허무하고 허무하다. 문제의 쇠조각을 그냥 또 하나의 우주선에 실어 보내면 됐지 구태여 뭐하러 이런저런 복잡한 일을 만들었는지 알 길이 없다. 아무려나 나 알 바 아니다.

요즘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하나씩 꺼내 읽고 있는데, 이 책도 그 일환이다. 알라딘을 검색해보니 이 책은 <<타이탄의 미녀>>라는 제목으로 다시 나왔다가 다시 절판되었다. 원제는 The Sirens of Titian이다. 이 책을 뭐 소장씩이나 하게 된 에피소드와 소회도 있다만 떠벌일 만한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