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을 산책하는 데 어디선가, 어떤, 모르는, 초로의, 아낙이 불시에 나타나며 여기 이런 게 있었어! 한다 돌아보니 주위에는 그이와 나밖에 없다 나는 그 소리가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싶어 순간 의아하다 순간 모르셨어요? 하는 대꾸가 나도 모르게 저절로 삐져나올 뻔 했다 그러나 그건 그이의 혼자말이다 누구더러 들어달라는 소리가 아니라 그저 저도 모르게 저절로 삐져나온 소리일 뿐이다 그러나 혼자 있으면 혼자말도 안 하게 되는 게 사람이다 아낙은 벌써 저만치 가버렸는 데 나는 그이의 혼자말이 새삼 쓸쓸하다 나는 입술을 움직여 혼자말을 해본다 가령, 오늘 밤에도 혼자말이 바람에 스치운다, 라고 해본다 그러나 이건 영 혼자말 같지 않다 나는 다시 정직하게 혼자말을 한다 미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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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림 비행기
날림 비행기가 식탁 위의 하늘을 자랑스럽게 선회비행하고 있다.
보라. 프로펠라가 용맹하게 돌아가는 모습을. 알흠답지 않은가.
비행을 마친 날림 비행기가 식탁위의 하늘에 자랑스럽게, 그리고 이게 중요한데 처량하게 매달려 있다.
<재료>
비행기 날개: 음료수 캔을 가위로 오리고 대충 접어서 씀.
비행기 몸통: 교보에서 파는 1,000원에 세 개 들이 형광 목걸이 포장용 플라스틱을 사용.
프로펠러: 교보에서 파는 500원 짜리 연필에서 뜯음.
모터와 스위치: 나우 장난감 중 어린이 치과 놀이 세트에서 뺌.
빨래 집게: 스위치를 ON 시킬 때 씀.
건전지 끼는 것: 지금은 쓰지 않는 소형 녹음기를 부수어서 씀.
전선: 아무거나 잘라서 씀.
나무 막대기: 비행기를 매달아 뱅뱅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씀.
녹차 깡통: 비행기 반대 쪽에 무게의 평형을 맞추기 위해서 씀.
도미노 조각: 녹차 깡통에 넣어 무게를 조절하기 위해서 씀.
식탁 위 조명에 매달린 철선: 미술관에서 그림 벽에 걸 때 사용하는 것을 아쉬운 대로 씀.
찍찍이와 클립: 프로펠러는 모터축에 고정시키고, 비행기를 나무막대에 매다는 데 씀.
건전지: 디카에 넣었던 것을 빼서 씀.
<제작 방법>
대충 만듬.
<필요 공구>
이것 저것.
이상. 책임 돌팔이 엔지니어. 따위
삼순이는 삼식이를 좋아해
셋째 딸이라서 이름이 삼순이인
삼순이는 삼식이를 좋아한다
이름 한번 촌스러운 삼순이가 좋아하는
삼식이의 본명은 삼식이가 아니다
이름이야 어떠하건 간에
삼순이와 삼식이는
갑돌이와 갑순이처럼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바퀴벌레들이다.
─ 나는 지금 ‘잘 어울리는 한쌍의 바퀴벌레들’이라고 말했다. 그래, 한때는 이런 표현이 유행했던 적도 있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그 시대 사람이다. 그 빌어먹을 시대. 그건 그렇고
내 본명의 가운데 자는 ‘충성 충’ 자다.
─ 기왕에 이런 이데올로기적인 글자를 자기 이름에 넣고 살아가야할 웃기는 운명이라면 차라리 무한 복종해야 하는 ‘충’자 보다는 무한 지배를 할 수 있는 ‘다스릴 치’ 자가 낫겠다는 생각을 한적이 있다. 하긴 나보다 더 촌스러운 이름을 가진 박충재도 있다. 그건 그렇고
‘충’ 자에는 모든 이름을 촌스럽게 만드는 강력한 ‘포스’가 있다. 못믿겠다면 지금 당장 자기 이름의 한 음절을 ‘충’ 자로 바꾸어 보라. 강력한 포스가 느껴질 것이다.
이름이야 어떠하건 간에
충순이와 충식이도 물론
갑돌이와 감순이처럼, 아니
삼순이와 삼식이처럼 잘 어울리는 한쌍의 바퀴벌레들일 것이다.
─ 이런 말까지 해서 구차하다만 내가 ‘것이다’라고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나를 충식이로 내 아내를 충순이로 부르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나를 충식이라고 부르는자, 지옥에나 가라. 그건 그렇고
그런데 삼순이가 충식이도 마음에 들어할까
삼순이는 삼식이를 좋아한다
충식이를 좋아해주는 사람은 충순이 밖에 없다
이름이야 어떠하건 간에
삼순이는 가끔 외롭다
그보다 더 촌스러운 이름을 가진 충식이의 외로움은
하늘을 찌를 정도다
이런 제길 왜
삼순이는 삼식이만 좋아할까
삼식이,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저녁 먹고
이렇게 하루 세번 먹는다고 삼식이가 된
삼식이가 뭐 볼 게 있다고
오, 내 사랑 삼순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