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1.
잠들기 전에 아들아이가 물었다
아빠, 왜 먹구름은 시커매?

2.
시인이여, 나는 지금
고독하게 오줌을 누다가 문득
죽기 전에 한번 죽어봤으면 좋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라고 쓸까
아니면
고독하게 오줌을 누다가 문득
죽기 전에 한번 죽어봤으면 좋겠다
는 생각이 떠올랐다
라고 쓸까
그것도 아니면 아예 아무 것도 쓰지 말까
라고 쓰고 잠이나 잘까
하는 자다가 오줌 누는 소리 같은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다
그런데 심각한이 좋을까
아니면 심오한이 좋을까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한심하다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오줌만 마렵다

철거와 은유

오래 된 집들이 철거된 자리는
쓰레기가 남몰래 버려지는
시간이 노골적으로 썩어가는
공터가 되어있다
포크레인 한 대가 땡볕 속에서 힘겹다
이제는 이런 풍경이 목가적인 풍경이다
물론 나도 휘갈겨쓴 플래카드가 나붙든 말든
목가적인 풍경 좋아하시네 하며
지나가면 그만이다 문득
이 마음을 다 철거하고 나면
나는 무슨 공터가 될까
내 마음의 공터에서 어떤 모질었던
인생이 악취를 풍기며 썩어갈까
은유적으로 생각해 보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다
낡은 집들이 철거된 자리는
널직한 공터가 되어있고 그들은
이 공터가 필요했던 것이다
밀고 다시 까는 것
나는 그새를 못참고 재개발 사업을
다시 컴퓨터에 무책임하게 비유하지만
사실 책임질 수 있는 비유는 많지 않다
그러니 지나가는 것이다
내 집은 벌써 오래 전에 철거되었으니
어머니의 항아리도 다듬이 돌도
다 두고 떠나왔으니
그런데 정말이지 이 쓸쓸한 마음마저 다
철거해 버리고 나면
나는 무슨 공터가 될까 그 공터에서도 누군가가
저 땡볕 속의 포크레인처럼 힘에 겨울까

심다공증

이 자리는 사람이 빠져나간 자리다
이 자리는 대타가 들어올 수 없는 자리다
이 자리는 이제는 당신도 비집고 들어 올 수 없는 자리다
이 자리는 다만 나의 자리다
이 자리는 텅 비어있다

나는 왜 순수한 삐짐에 몰두하지 못할까?

빌어먹을! 나도 나이를 먹기는 먹었나부다.
어떻게 삐진 게 단 이틀을 못가냐?
왕년에는 한번 삐지면 다시는 얼굴을 안 보기도 했었는데…
슬프다.
이제 삐질 만한 일도 자꾸만 줄어들어간다.

등나무 그늘에서

이봐 그쪽으로 가지마 그쪽으로 가면 안 돼 그쪽에는 아무도 없어 그러나 굳이 아무도 없는 쪽으로만 뻗어나가는 등나무 가지 하나 허공을 움켜쥐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움켜쥐어도 그건 그저 허공이다 허공은 빌 ‘허’ 자에 빌 ‘공’ 자를 쓴다 그러고 보니 어느 결에 나도 빌 ‘허’ 자에 빌 ‘공’ 자를 쓰게 되었나 보다 이제 내게로 가지를 뻗어오는 이는 나를 만나지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