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위한 초콜릿”

<<다빈치 코드>>의 한 문장:
“랭던 교수의 여학생들은 이 목소리를 ‘귀를 위한 초콜릿’이라고 표현한다.”
재미있는 비유다.

또 다른 문장:
“고통은 좋은 것이다.”
1975년에 죽은 “스승 중의 스승인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신부의 신성한 주문”이란다.
문맥과 상관없이 ‘고문기술자’들 생각이 난다.

이제 막 읽기 시작했는데 책을 다 읽고나면 저 비유만 남게 될까봐 살짝 겁난다. 날림독후감을 쓰게 될지는 미지수. 내 책 아님. 스포일러 사절.

지금은, 쉼표를 찍어야 할 때

글을 쓸 때 쉼표는 언제 어디에 찍어야 할까.
쉼표는 쉬라는 뜻이니 쉬고 싶을 때 쉬고 싶은 곳에 찍으면 되는 게 아닐까.
나는 지금까지 나 찍고 싶은 자리에 나 찍고 싶을 때 쉼표를 찍어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금은, 다시 쉼표을 찍어야 할 때 ──.

그러나 하루 아침에 ‘읍니다’를 ‘습니다’로 바꾸어버린, ─ 내가 군대 갔다 오니 세상이 변해 있었다 ─ 1989년 3월부터 시행된 맞춤법에는 쉼표의 사용법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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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의는 미끄러진다.”

“언어과학이 내건 슬로건은 다음과 같다. 기표와 기의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질서를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의미작용에 저항하는 저항선에 의해 처음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의미는 어떤 특정한 기표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표들의 연쇄 속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사실이다. 의미화 작용을 대신할 만한 어떤 초월적 기표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기의가 끊임없이 기표 아래로 미끄러져 갈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기의는 미끄러진다. 기의가 미끄러진다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기의 따위는 그만 포기하고, 오오 미련을 버리고, 기표들의 연쇄작용에나 ─ 의미를 만드는 것은 이것이므로 ─ 신경쓰라는 건지. 처음부터 아예 뭐든지 의미하려 들지 말라는 건지. 아니면 에라 모르겠다 기왕 미끄러질 거 열심히 미끄러지겠다, 라는 심정으로 의미할 수 없음을 절망하라는 건지.

그러나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너나 나나 결국 미끄러질 수 밖에 없는 걸.

버스에서 낯선 사람과 함께 앉는 것에 대하여.

낯선 사람 옆에 앉는 걸을 좋아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지하철에서든 버스에서든 서로 모르는 사람들은 서로 떨어져 앉게 마련이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 떨어져 앉기 위해 그들 사이에 남겨 놓는 사람과 사이의 빈 공간, 나는 이 빈 공간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의 완충지대’라 부르겠다. 너무 길다. 줄여서 그냥 ‘완충지대’라 해야겠다. 심리학적으로 이 ‘완충지대’를 의미하는 용어가 있었던 듯도한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귀소의 시간. 버스를 탔는데 나 앉을 자리는 완충지대 밖에 없었다. 나는 아무 완충지대나 앉았다. 그런데 아무데나 앉았다는 이 말 정말일까? 아닌 듯하다. 나는 남아있는 완충지대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자리를 골랐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자리를 고르는 기준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 있으면 다시 말하겠다.

어쨌든 내가 자리에 앉자, 이번 생에서 나와 한 30분 정도 근거리에 앉는 인연을 맺게 된 옆자리의 여자는, <쩝. 여기 말고 자리 많은 데 이 아저씨가 하필이면 왜 여기 앉는 거야. 젊으나 늙으나 그저 예쁜 건 알아가지고...>하는 생각을 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창가쪽으로 몸을 바싹 붙여 나와 저 자신 사이에 다만 몇 센티미터라도 완충지대를 만들려고 했다.

(졸리다. 날 밝으면 계속)

날 밝으니 다 귀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