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하나

스물하나를 세는 것이 왜 그리 중요한가. 거리에서 흔하게 마주치는 21세기음악학원, 21세기공인중개사, 21세기의원, 21세기약국, 21세기속독학원 따위의 간판들을 그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가 매번 여자에게 차인 것은.

고구마적인 너무나 고구마적인

고구마는 밤고구마, 물고구마, 호박고구마 등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밤도 물도 호박도 다 고구마가 아니다. 고구마도 아닌 천한 것들이 감히 고구마님의 정체성을 규정하다니.

그해 겨울, 본격적인 군고구마 선거 시즌이 다가오자 고구마들은 각자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구마적인 고구마라고, 따라서 자신이 대표 군고구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종로에서 만나 오래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이들 훌륭한 고구마 가운데 과연 어떤 고구마를 대표 군고구마로 선출해야 하는지의 문제를 놓고, 내가 먹고 싶은 고구마가 제일 맛이 좋으니까 내가 먹고 싶은 고구마가 진정한 고구마이며 그러므로 내가 먹고 싶은 고구마를 너도 찍어야 한다고 입씨름을 벌였다. 그게 고독을 고백하는 것보다 의미 있는 일이었다.

라이터, 겨울

날이 추워지자 1회용 라이터도 내면을 잔뜩 웅크리고 있다.
부싯돌에 살짝만 스쳐도 열불내며 타오르던 것들이 그 성질 다 죽이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하나 켜지는 것마저 그 불길이 영 불길하다. 추웠구나.
보잘것없지만 사람의 손을 내밀어 라이타의 손을 꼭 잡아주고
나는 보일과 샤를과 아보가드로를 생각한다.

낙엽의 풍장

가을이다.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진다. 산에 떨어진 낙엽은 눈과 비와 바람과 햇살과 어둠을 만성적으로 누리며 저를 떨군 나무 밑에서, 아니면 최소한 그 나무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오랜 세월을 두고 분해된다. 이것은 한때 남부럽지 않게 푸르렀던 낙엽에게 주어지는 자연의 마지막 제의인 셈인데 나는 이것을 낙엽의 풍장이라고 부른다. 도시의 낙엽은 사정이 다르다. 도시의 낙엽은 분주한 행인 1, 2, 3호의 발에 밟히고, 질주하는 자동차에 치이고, 청소부의 비질세례 받다가, 결국에는 쓰레기 봉투에 담겨 어디론가 끌려간다. 저의 모태였던 나무와는 생이별을 한다. 끌려간 낙엽들이 화장을 당하는지 매장을 당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교하는 아이들을 유혹하며 붕어빵을 파는 리어카 옆에서 곧 트럭에 실려갈 운명의 낙엽들이 쓰레기 봉투에 감금된 채 마른 비명을 삼키고 있는 지금은 다시, 회한처럼, 저주처럼, 가을이다. 찬바람이 불고, 낙엽이 진다. 당신은, 내가 떠난 줄 알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