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오 원정대

1.
형, 구슬 옥 자도 쓸모가 있다.
뭔데?
으응, 자리 좌 자와 합쳐서 옥좌.

2.
이야기의 힘은 강하다. 아이가 요즘 들어 부쩍 레고, 레고 하길래 왜 그런가 했더니 이야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레고에 닌자 이야기를 더한 닌자고에 몰입하더니 오늘 아침에는 이집트로 고고학 탐험씩이나 떠나고 계시다. (앞문장의 주어는 막내다. 요새는 주어가 없다고 시비 거는 분들이 믾아서 이렇게 괄호 열고 쉴드 친다.) 이름하여 파라오 퀘스트. 이 녀석아, 파라오 다 죽고 없거든!

옛날 어떤 시인은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신문 보는 더리한 모습을 시로 승화시켰다. 그러니 어쩌면 변기 위에 앉아 아이폰으로 한 모음, 한 자음, 정성스럽게, 눈물겨운 부정을 타이핑하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도 어쩌면 한 폭의 아름다운 시일지도 모른다.

애정 천국 감시 지옥

토요일 오전, 편안히 늦잠 주무시는 아내님 곁에 누워 있는데 방문을 열고 들어오던 막내가 보더니, 지금 안방에서는 미성년자 관람불가 신이 연출되고 있사오니 출입을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드립을 치고 나간다. 이어 그위의 형이란 놈이 들어 오더니, 뭐 이 정도 가지고 그러냐, 면서 그대로 몸을 날려 내 위에 올라 타서는 스타2 좀 해도 되느냐고 조용히 묻는다. 허락해 주지 않으면 애정행각은 이걸로 끝이라는 뜻일 터. 협상을 마친 녀석이 득의양양해져서 나가고 난 뒤, 이제 영화 좀 본격적으로 찍어볼까 하는데 이번에는 아내님이 일어나 나간다. 나가 버리신다.

그리하여 나는, 애들한테 컴퓨터도 빼앗기고 나는, 살찐, 낡은 소파에 처량하게 기대 앉아 아이폰으로 블로그에 이 따위 청승맞은 글이나 올리고 있는 것이다.

외로워라.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영화 찍을꼬.

@_@

1.
막내를 붙잡고 뭐 좀 가르쳐볼까 했더니 녀석이 급하고 중요한 일을 할 게 있다고 핑계를 댄다. 그럼 가서 너 할 거 해라, 했더니, 야호, 해방이다, 하면서 간다.

2.
최규석 단편집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아이들이 좋아한다. 의외다. 역시 아이들은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족속들이다. 저것들은 내버려 두고 나는 내 인생이나 살아야겠다.

아내의 충고

사모님이 화장대에서 꽃단장을 하신다. 어디 좋은 데 행차라도 하실 모양이다. “가지마. 날 두고 어딜 가.” 나는 사모님에게 가 엉긴다. 사모님, 귀찮아 하시는 표정이 역력하다. 사모님, 기어코 한 마디 하신다. “올해는 두 가지만 해.” 당할 줄 뻔히 알면서 와서 엉긴 내 불찰이 크다. 1절만 하셨으면 좋겠다. “첫째는 살을 5킬로그램만 빼.” 뭐 이 정도 멘트야 들어도 싸다. 나머지 하나는 무엇일까. “그리고 제발 좀 말 좀 이쁘게 해.” 듣고 보니 사모님, 바람이 참 소박하기도 하시다. 내 말본새가 본디 좀 그렇긴 하니까.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거 영과 육을 동시에 환골탈퇴하라는 거 아닌가. 결국 날더러 새 사람이 되라는 거 아닌가.

스도쿠

스도쿠를 하다 보면 안다. 어떤 숫자가 그 칸에 들어갈 정확한 답인지, 아니면 일단 넣어 놓고 보자는 심산으로 써넣는 숫자인지. 전자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성취감이 파도를 치며 몰려드는데 반해, 후자의 방법으로 문제를 풀고나면 어쩌다 운이 좋아 문제를 푼 것이라는 자각에 뒷맛이 영 개운치가 않다. 체스 천재를 다룬 <위대한 승부>라는 영화에 보면 사부님이 제자에게 체스판의 말들을 모조리 쓸어버린 다음 빈 체스판을 앞에 두고 수를 읽는 방법을 가르치는 장면이 있다. 스도쿠도 저 영화에 나오는 방법으로 어떤 칸에 들어갈 숫자를 콕 찝어내기 전에는 손을 움직이지 말아야 하리라. 오늘도 나의 스도쿠에는 빈 칸이 너무 많다.